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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womanB Oct 08. 2019

그렇게라도 붙잡아두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무너지는 걸 알면서도 그를 놓지 못했던 시간들이 쓰라리다.

 우리는 2개월을 사귀었다. 그리고 나는 그 후 2년 동안, 그와의 이상한 관계에 매달렸다. 그가 다시 나를 그때의 그 눈빛으로 바라봐주길 바라면서.


 그는 참 좋은 남자 친구였다. 그에 비해 나는 많이 어렸다. 별 것 아닌 일로 토라지면 그는 내가 제대로 내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집안 사정이 안 좋다며, 내가 기다리는 것이 싫다며 이별을 선언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 같았다. 내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를 힘들게만 해서 그가 나와의 사귐이 그에게 찾아온 힘든 시기에 힘이 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 스스로 정말 많이 원망했었다.


 그리고 6개월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 나와 친해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기뻤다. '다시 잘 만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가와 스킨십을 했고, 그 뒤로 내가 하는 연락은 거의 무시했다.

 내가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그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나에게 마음을 조금 연 건가 싶었지만 몇 시에 만나 밥 먹고 들어가자고 했을 때 그는 "왜? 왜 밥도 먹어?"라고 물었다. "아니, 밥 먹고 영화 보자고.." 이제껏 친구들과 만나도 영화만 본 적은 없었기에 그의 물음이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밥 먹고 영화 본다고 우리가 사귀게 되는 건 아니야. 넌 생각이 너무 빨라." 먼저 다가와 진도를 한껏 뺄 땐 언제고, 그저 밥 먹고 영화 보자는 나에게 속도가 빨라 부담스럽다고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임을 알면서도 나는 또 그가 지쳐 떠날까 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우린 정말 영화 시간에 맞춰 만나서 영화만 보고 헤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연락을 꼬박꼬박 하던 그는 이제 없었다. 전화를 하면 바로 받던 그도 없었다.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의 눈도, 행복하게 웃던 그의 미소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그에게 어떤 것도 같이 하자고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큰 용기를 내어 밥을 먹자고 하거나 영화를 보자고 하면 그는 일단 알겠다고 했지만 약속일을 정확히 잡지 않았다. 내가 날짜를 말하며 그때 가봐야 안다며 얼버무렸고 나는 일정을 비우고 기다렸다. 하지만 당일이 돼도 그는 연락이 없었고, 내가 가능하냐고 연락을 하면 그제야 '일이 많아서 안될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나서 다시 침묵했다.

 내가 연락을 하지 않고 두면 한 짧게는 2주일 길게는 3달 정도 후에 그가 연락을 해왔다. 연락의 목적은 하나였다. 그때 바빠서 못 본 영화를 본다거나 그때 먹지 못한 밥을 먹는다거나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제대로 지키는 약속은 이렇게 본인이 끌릴 때 연락해서 하는 스킨십을 위한 만남뿐이었다. 그와의 스킨십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절하면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이대로 두면 언젠가는 그가 이전의 모습으로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밤 11시에 같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던 그의 마음이, 회식이 끝나고도 보고 싶다고 10분이라도 보자고 하던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왜 그때는 몰랐을까. 


 2년, 그렇게 돌아오지 않을 예전의 그를 기다리며 2년이라는 시간 지냈다. 2개월의 만남 동안 성숙하지 못하게 그를 대하고 좋은 추억을 더 많이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그가 돌아올 거라 믿으며 지낸 2년 동안 내 자존감은 내려가다 못해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끊어내야지, 연락이 와도 받지 말아야지.'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왜 그런 놈을 못 끊어내. 네가 뭐가 아까워서!"라는 말을 들어도 객관적으로 누가 더 나은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심리적으로 철저하게 을이었다. 그가 돈 들이지 않고 만질 수 있는 여자가 나여서 그래서 만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보여주는 그의 눈빛이, 미소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음번엔 나아지겠지, 다음번엔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그렇게 해주겠지, 그러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잘 만날 수 있겠지'라고 희망을 갖게 했다.



 몇 번의 약속이 거절되고 나서, 나와의 약속은 지키지 않고 다른 친구들과 노는 것을 보고 나서, 더 이상은 상처 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상처 받지 않는 척 옆에서 계속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 애교를 섞어 "왜 이렇게 바빠, 살아는 있는 거야?"라고. 그는 "왜 이래."라고 대답했다. 그와 다시 이상한 만남을 하게 된 이후, 내가 정상적인 서로에게 애정이 있는 남녀가 갖는 감정의 흐름 같은 것들을 요구할 때마다 듣는 말이었다. "왜 이래." 그 뒤로 계속 나는 길게 쓰고 그는 단답인 대화가 이어갔다. "공부나 해."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래"

 나도 답답형으로 대답했다.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은 나를 그 앞에서 낮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젠, 그만하자.'라는 생각이었다.

 "오늘은 뭐해?"

 한참 뒤 그가 갑자기 물었다. 그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만나고 싶어 연락을 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어 "왜 이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대뜸 뭐하냐니. "그냥, 책 좀 보다 퇴근하려고."

 "괜찮네"

 이건 무슨 대답이지.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상할 대로 상한 마음이었다.

 "그래. 그래라."

 상한 기분을 한껏 드러냈다.


 대꾸가 마음에 안 드네. 그냥 나 혼자 집에 가야겠다. 수고하렴.


 어이가 없었다. 본인이 계속 단답으로 내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마지막에 내가 좀 투덜댔다고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니. 그깟 차 좀 있는 게 무슨 유세라고 혼자 가야겠다는 협박이라니. 애초에 시간이 맞으니 같이가자고 말하기나 했나. 그렇게 하면 내가 잡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난 이제껏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만하고 싶었다. 더 이상 배려 없이 본인 멋대로 내 마음을 쥐고 흔드는 그 앞에서 나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도 니 대답 맘에 안 들어서 혼자 가려고. 잘 가.



 그 뒤로 그는 연락이 없었고, 나는 덧붙이고 싶은 많은 말들을 삼켰다.

 '그래. 이거로 된 거야. 남은 답답한 마음들은 내가 잘못한 선택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자. 이제 그만하자.'


 그런데 만약,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이 상처가 아물 언젠가에, 그가 다시 연락을 해 온다면 나는 다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이없게도 그 상처 많던 그 시기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그가 다시 연락을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었던 건 내가 정말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의 나쁜 행동들이 나를 그렇게 훈련시켰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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