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촌, 향도 (12)
약의 성분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약들을 먹고 자면 열두 시간을 자야 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새벽 한 시 넘어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2시가 되어서야 평소보다 잔뜩 쌓인 눈곱을 떼면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한 번 끓여준 국을 다시 끓이고, 아버지가 지어둔 잡곡밥을 숟가락으로 힘겹게 픈 다음, 냉장고에 있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가져다주신 반찬을 꺼내어 첫 끼니를 먹었다. <김씨네 편의점>을 보면서 먹으니 속도가 느린 건 당연지사였다. 평소라면 설거지까지 해놓으려고 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늦게 일어나기 때문에 첫 끼니를 먹고 '아침'이라 적힌 약봉지를 자주 잊어서일까 설거지가 하기 싫었다. 그렇게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두세 편을 더 보고서야 집을 나갈 마음이 들었다. 네 시가 다 되어서야 나와 집 2층의 카페로 향했다. 처음엔 여행객 마냥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가장 가까운 길을 기억해내고 6개월 전엔 중국집이 있던 엔제리너스 커피에 자리했다. 한 잔에 4,800원. 긴 횡단형 테이블에 앉으니 오륙도와 광안대교가 보였다. 지난번 왔을 때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이 노트북을 열었다. 들고 온 책은 달랐다. 그때 무슨 책을 들고 와 앉아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권여선의 소설집을 들고 왔다. 이번 주 내내 넷플릭스만 봤으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소설을 읽는 게 맞았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노트북과 페어링을 했다. 뭘 들을까 고민하다 타케우치 미유의 노래를 틀었다. 노래를 틀었다기보다는 '내 타입'이 들어간 미유의 라이브 섹션을 켰다. 유튜브가, 그리고 유튜브 프리미엄이 없는 시대에선 어떻게 살았을까. 해운대는 언제나 나에게 시티팝의 도시다. 도시의 향취와 모래사장의 향취가 동시에 느껴지는 곳. 운 좋게 김봉현 작가님의 이벤트 덕분에 시티팝을 주제로 한 파티에 참여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권여선의 소설을 접한 건, 이효석문학상 덕분이었다. 「희미한 영역」과 「전갱이의 맛」 두 편 만으로도 나는 그녀의 소설집이 나오면 꼭 사리라 결심했었다. 권여선의 소설은 감각적이며 날카롭다. 녹록지 않은 삶의 파열음을 세련되게 풀어낸다. 세 편을 읽고서는 어차피 다시 읽을 거면서, 아까움에 두 편을 남겨 둔 채 책을 덮었다. 정면을 보니 4인석은 비어있었고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다. 집에 아버지는 돌아와 있으실까 궁금하다. 아버지가 계시다면 오늘의 먼지를 털어내고 적당히 티브이를 보다가 자겠지. 취침 전 약은 꼭 챙겨 먹는다. 디아제팜, 페르페나진정, 그리고 이름을 쉬이 외울 수 없는 알약 한 움큼 없이는 잠들 수 없기 때문에.
즐거운 슬픔, 슬픈 웃음. 그러니까 아이러니. 또 하루를 이렇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