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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촌 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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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VN Solo May 12. 2020

7급

이촌, 향도 (13)


 군의관의 행정적인 말투 너머로 7급을 받았다. 3개월 뒤에 다시 방문해서 나의 등급을 매길 것이라 설명해주었다. 예상치 못한 판정이었기 때문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86일이 남았다. 12주 하고 이틀. 미필 스물아홉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반려당한 논문을 다시 고쳐보겠다고 말은 했으나 내가 아직 그 활자들과 마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내가 바른 길을 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논문이었고, 그만큼 미완성의 논문이 할퀴고 간 자국은 깊은 흉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올라와 이틀 연속으로 땀을 냈다. 땀을 낸다는 것은 운동을 한다는 것이고 운동을 한다는 것은 힘을 쓴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틀 연속으로 힘을 썼다. 내일도 피티 일정이 잡혀있으니  나는 삼일 연속으로 힘을 쓸 예정이다. 주치의는 내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의 힘을 잘 믿지 않는다. 한껏 이유도 모르고 불안해하던 시절에도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새벽 두 세 시쯤 까지 게임하다 잠들면 열 시쯤 일어나 과제나 논문을 썼고 일정이 있을 때면 학교에 갔다. 오후 두 세 시쯤이 되면 또다시 게임을 시작했으며 식사는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다. 그러니까 '규칙적인 생활'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검 날까지의 12주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말은 사실 그 기저에 (건강하게)라는 대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매주 빠짐없이 정신과를 가는 것도, 할인한다는 말에 혹해 피티를 시작하게 된 것도 다 사실은 대전제 속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건강하지 않다는 건 무엇인가. 나는 건강하지 않아서 건강해지기 위해 피티도 받고 정신과도 다닌다.

 몸과 마음. 둘 다 건강하지 않은 스물아홉, 건강의 경계에서 7급을 받은 나는 여전히 내가 나아지고 싶은지 조차 모른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닌 지 오래되었다. 그동안 나의 주인은 누구였나? 오랜 세월 날 갉아먹은 불안은 유력한 용의자다. 지금도 호시탐탐 내가 수면과 제정신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릴 때면 암막 커튼 사이로 불안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다. 불안은 세상을 두렵게, 나를 게으르게 만든다. 나는 오래도록 나를 지배해오던 불안의 존재를 1년 전에야 알았고 이제야 조금씩 그 형체를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이 파악해 가는 중이다.

 12주와 이틀, 86일이 지나면 나는 어떤 판정을 받을까. 그리고 그때쯤이면 불안과 나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 나는 건강해질 수 있을까. 나는 건강해지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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