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촌, 향도 (19)
2020년 들어서 많은 일을 겪었다. 2011년부터 2019년부터 겪었던 것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말이다. 그 시간들보다 더 많이 울었으며 더 많이 화냈으며 더 많이 게으름 피웠으며 그렇게 더 많이 나를 드러냈다. 이전의 나는 '나'의 자존감은 없다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자존감의 반대말에 관해 많이 생각했다. 그것은 '자해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보았을 때, 데이트가 어느 날보다 더 로맨틱할 때, 친구들과의 모임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 그러니까 행복이 날 찾아올 때마다 행복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리고 돌아와서는 우울이 여지없이 나를 찾아왔다. 그럴 때면 조소 가득한 힙합들만 골라 들으며 게임을 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땐 다 떨어져 있는 점들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여러 특징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기보다는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억지로 과도한 의미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특히나 길었던 연애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투영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에게는 충분한 안전망이 있었음에도 나는 자의로서든 아니든 그것들을 거부했으며 그렇게 '괜찮아,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던 나는 점차 가라앉는 중이었다. 내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매년 1월 1일 다짐하고 1월 2일부터 한심한 생활을 반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막연한 두려움은 여전히 크다.
2020년 들어서 겪었던 변화들 중 책을 읽고 나눌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가장 큰 행운이었다. 텍스트와 말들로 이어진 소중한 사람들. 함께여서 고마운 인연. 정기적인 독서모임은 나를 심연 속에서 끄집어내 같이 저 햇살을 맞이하러 가자고 제안하는 듯하다. 읽는 책은 지루할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고 흥미로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매 달 혹은 2주에 한 번씩 주어진 책을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눴다.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여기저기를 탐방했으며 혼자서 절대 안 해볼 모형 집도 만들어보았다. 또 다른 모임에서는 좋은 카페를 알게 되었고 혼자라면 읽지 않을 두꺼운 책들에 도전했다. 단지 책 속의 텍스트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인생 선배들의 다양한 경험들을 들으며 나의 삶을 반추하게 될 때도 많았다. 그렇게 홍대 인근을 좀 더 잘 알게 되었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끝으로 독서 모임의 좋은 기억 속에서 맞고 틀림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멀리했던 대학원 사람들과 쓰다만 졸업 논문을 다시금 가까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 내가 독서모임을 들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막연히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내가 주도하는 나의 독서모임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깊이 있는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다. 전자는 사회에서, 후자는 대학원 사람들과 할 수 있을 테지. 이쯤 되면 독서모임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나 스스로가 성장해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