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의 역사 시리즈 2부
“기적은 없었습니다. 독일군의 차가운 무한궤도가 피 냄새나는 전장을 가로지으며 히틀러의 광기의 집착은 더욱 집요해졌습니다.”
1939년 8월 23일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습니다. 서방의 국가들이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독일은 그 공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군이 국경을 넘어왔다는 명분으로 침공을 시작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끝없는 영토확장의 야욕을 막기 위해 9월 3일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즉각적인 군사개입은 없었고 폴란드에겐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기갑부대와 공군이 폴란드 지역을 유린하였고, 폴란드군은 2주 만에 무력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악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39년 9월 17일 소련의 군대는 파도처럼 폴란드의 동부로 진격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련은 비교적 저항 없이 진격, 독일군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만나 분할이 완성되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9월 28일에 항복합니다. 겨우 한 달 만에 폴란드는 무너지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방어중심의 전략으로 독일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실질적인 교전은 없었기에 독일은 1940년 4월까지 군을 재편성하고 북유럽 침공을 준비합니다.
히틀러의 침공은 4월 9일 덴마크를 시작으로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고 연합군은 독일이 북유럽에서 철광석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노르웨이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독일의 진격에 대응할 준비가 부족했었고 작전은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지상작전에 공군을 투입시켰고,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는 하늘이 찢어지는 사이렌으로 연합군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좋았습니다. 결국 1940년 5월 초 연합군은 노르웨이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노르웨이는 독일의 차지가 됩니다.
영국의 총리 체임벌린은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에 책임을 물어 5월 10일 사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 20세기를 바꾼 인물이 총리가 되는데 바로 윈스턴 처칠입니다.
“정부 관료들에게 말했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피와 수고,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취임한 처칠의 첫 하원 연설에서
그 무렵 독일의 장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본인의 획기적인 계획을 전달합니다. 그는 기습을 통하여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기존의 장군들의 작전보다 과감한 그의 계획이 마음에 들어 하였고 바로 그를 지원하였습니다. 처칠이 취임한 첫날, 독일은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공수부대는 전략적 요충지의 교량들을 점거하였고, 공군은 비행장을 폭격하였습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공습을 버틸 수가 없었고, 처칠은 독일이 영국에 대한 침공을 위해 영국 해협과 인접한 항구를 점령한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연합군 역시 대비를 하고 있었고 재빠르게 대응합니다. 정예 병력을 벨기에로 보내지만 남쪽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정찰을 다녀온 정찰기들에게서 독일의 국경으로부터 아르덴을 향하는 엄청난 군용 차량의 행렬이 늘어서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령관인 가믈랭 장군은 믿지 않았습니다. 조기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프랑스는 기회를 놓치고 독일은 이제 아르덴을 지나 프랑스의 스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아르덴숲의 지형이 복잡하기에 독일의 전차부대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지만, 만슈타인은 그 허점을 정확하게 찔렀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은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고, 유선 통신이나 기수를 통해서만 전장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의사소통을 하였습니다. 통신선은 언제나 폭격으로 끊어지기 일쑤였고 기수들도 피난민들 때문에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늦은 통신 수단은 전장의 소식에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의 군 지도부는 독일군이 2주가 걸려 스당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독일군은 3일 만에 도착합니다.
만슈타인의 전략은 과감했습니다. 기동 전을 이용하여 적들이 예상치 못한 전술 그리고 빠른 진격 속도는 연합군의 허를 찔렀습니다. 독일의 군사적인 열세가 분명하였으나 독일은 엄청난 지구력을 보여주었고 훗날 필로폰이라고 불리게 되는 퍼버틴의 보급으로 병사들이 잠도 자지 않고 프랑스로 진격을 하였고 그 속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습니다.
3일 동안 독일군은 멈추지 않았고 아무런 방해 없이 프랑스의 스당으로 진격합니다. 6만 명의 병력과 2만 2천대의 차량 그리고 850대의 전차는 프랑스의 국경을 밟았습니다. 포위 전과 신기술의 이용에 능한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지휘아래 독일은 공군과 전차를 이용한 전략은 방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프랑스 방어전선의 군사들에겐 악몽과 같았습니다.
프랑스는 기동 전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고 그를 위해 준비한 마지노선은 이제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고 기동력을 중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저 스당을 사수하라라는 명령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도 날이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악몽 같은 참호전에서 벗어났지만 겨우 20년 만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고, 벙커 아래에서 하늘을 찢는 슈튜카의 사이렌 소리와 폭격에서 오는 굉음에 병사들을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사실 사상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떠올리기는 충분했습니다.
그 공포는 전장을 휩쓸게 되고, 프랑스는 반격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5월 13일 뫼즈강을 건널 당시 독일군은 전차의 호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반격의 기회를 놓치고 14일 정신을 차린 후에 반격을 하려고 하였을 땐 이미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가 뫼즈강을 넘어온 뒤였습니다.
북쪽에서는 독일군이 로테르담 항구를 폭격하고 있었고 천명이 사살당합니다. 네덜란드는 전의를 상실했고 4일 만에 무너집니다. 한편 스당의 프랑스의 방어선이 붕괴하자 구데리안은 보병이 따라잡을 수 있게 진격을 늦추라는 상부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진격을 하였습니다. 구데리안의 속도에 군지도부와 프랑스의 정치 지도자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의 총리 폴레노는 처칠과의 통화에서 프랑스가 막을 수 없을 거 같다는 말을 전하기도 하였고, 겨우 5일 만에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던 프랑스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5월 20일 상부에 명령을 무시한 구데리안은 결국 대서양 해안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군의 지도부는 구데리안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합군 대부분은 좁은 지역에 갇히게 되었고 독 안에 든 쥐 신세였습니다. 전선이 붕괴되고 보급선이 끊기게 되면서 전황은 완벽하게 독일이 압도하게 됩니다. 독일의 구데리안은 점점 포위망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공군의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육군의 공격을 멈추고 공군이 처리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히틀러는 완벽한 승리에 목이 말랐습니다. 현재 승리 직전의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 그는 더욱 강력한 진격을 명령하였습니다. 괴링도 공군을 투입시켜 육군과 협력하여 연합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을 압박하였고 엄청난 사상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승리 직전인 상황에서 승리를 예상한 육군과 공군의 정치적인 이권 싸움으로 인해 명령 체계에서 불협화음이 있었고, 독일군은 모든 해안선을 포위하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의 처칠은 이틈을 이용하여 덩케르크에서 영국군과 그밖에 프랑스군들을 포함한 연합군의 철수를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민간 배들과 군함들이 탈출하려는 군인들의 구조를 시도하였지만 슈투카의 절망의 나팔이 하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육군은 맹렬하게 저항하는 프랑스군에게 막혀 뒤늦게 덩케르크에 합류를 하게 되었지만, 전차의 육중한 무한궤도와 엔진소리는 군인들은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피가 흐르는 전장에서 병사들을 폭격과 전차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피로 뒤덮인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영국의 스핏파이어가 독일의 슈투카와 전차들을 방해하며 엄호한 덕에 처절한 후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기적은 없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선 피가 흘렀고, 독일군의 차가운 무한궤도가 피 냄새나는 전장을 가로질렀습니다. 히틀러의 집착은 더욱 집요해지고, 해안선 완전히 봉쇄한 이후 약 30만의 병사들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탈출한 병사들은 채 5만이 되지 못했습니다.
히틀러는 피로 얼룩진 군화들을 다시 파리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파리의 시민들은 피난을 가거나 저항을 하진 않았습니다. 이미 침략당한 국가들의 수도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았고 파리의 시민들은 건축학의 보석인 파리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6월 14일 파리에 독일의 군대가 입성했습니다.
히틀러는 이 압도적인 승리를 프로파간다로 활용하며, 1차 대전의 치욕을 지우고자 했습니다. 6월 22일 히틀러는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에서 이루어졌던 휴전협정에 사용되었던 열차를 직접 박물관에서 가져와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망명을 가게 되고 총리였던 폴레노의 후임으로는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으나 그는 이미 프랑스가 패배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북부는 독일이 점령하게 되고 남부의 도시 비시에서 비시프랑스라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됩니다. 그는 대독협력적인 정부의 허수아비 수장이 되었고 이를 끝으로 프랑스는 독일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습니다.
이제 자유, 평등, 박애의 상징인 프랑스는 몰락하고 파리에는 아퀼라(나치 독일의 상징인 검독수리이자 국가수리)가 내려앉았습니다. 이제 히틀러와 나치의 진군은 도버 해협 넘어 유럽의 마지막 희망이자 보루인 영국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승리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은 유럽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언젠가는 정복할 소련의 넓은 영토 위에 새겨질 위대한 제국의 역사를 위해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유럽 전역을 피로 물들일 것입니다.
*덩케르크 작전부터는 저의 상상이 들어간 허구의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Rotterdam, Laurenskerk after the bombing, May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