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히틀러가 영국을 봉쇄했다면?

만약의 역사 시리즈 3부

by kim

“슈투카의 하늘을 찢는 나팔이 도버해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남부는 불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나치의 깃발이 올라고 전 세계는 이제 히틀러의 이름 앞에 전율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진격속도 압도적인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거의 모든 전선을 정리한 그의 군대는 악의 진군과도 같이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과 협정 혹은 강화를 먼저 제안합니다. 영국을 흠모해 왔던 히틀러는 영국이 강제적으로라도 협정을 맺을 거라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그런 히틀러의 반응에 냉담하였습니다. 그 무렵 1940년 6월 말, 히틀러는 영국의 함대가 프랑스의 주력함대가 있는 메르스엘케비르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히틀러는 비시정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던 장 프랑수아 다를랑 해군 총사령관에게 이 사실은 알렸고 비시정부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유럽의 가장 중요한 동맹 중 하나였던 영국의 공격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던 프랑스 해군에겐 굴욕적인 일이었습니다.


1940년 7월 3일 이 사실을 모르던 영국함대는 메르스 엘케비르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프랑스의 주력 전함들은 이미 북쪽으로 이동해 있었기에 큰 피해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있는 물자는 한정적 이였기에 많은 수의 해군의 손실과 구축함들의 파괴가 이어졌습니다. 영국의 처칠은 무언가 잘못됨을 느끼고 있었고, 비시 프랑스 정부와 히틀러의 분노가 담긴 담화가 세계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은 비시 프랑스의 중요한 동맹이자 전우라는 선전과 함께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프랑스를 기습 공격한 처칠을 정치적으로 공격합니다. 히틀러 역시 처칠이 더 이상 본인과 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프랑스의 해군의 총사령관 다를랑과 협의를 이끌어내 함대 일부를 북해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 함대 중에 프랑스의 전함인 덩케르크도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전투에 대한 참여는 아니었으나 프랑스의 함대가 북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칠에게 압박을 주었습니다. 사실 프랑스는 독일 함대 수송선의 호위정도만 하였지만 히틀러는 더 크게 과장하여 선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동을 히틀러는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였고, 이는 실제보다 더 큰 협력이 있는 것처럼 과장되어 전파되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독일과의 직접적인 협력 의사가 없었지만, 영국의 기습은 프랑스인들에게 배신감과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의 함선이 수송선의 호위에 사용되는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그저 방관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소극적인 방관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마치 프랑스 해군이 독일과 연대하여 영국을 압박하는 선전을 하였고 영국의 국민들도 동요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침공을 준비합니다. 그의 이상적인 국가 게르만을 위한 제국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서유럽의 전선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서양의 미국과 맞닿아 있는 영국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영국의 항복 혹은 그에 준하는 대서양의 봉쇄가 필요하다 판단하였기에 상륙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그의 계획에 공군의 총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영국 해협으로 들어가는 모든 수송선의 출입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그는 4일 안에 영국 남부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4주 안에 영국의 공군을 괴멸시켜 보이겠다고 하였습니다.


1940년 7월 10일 60대의 독일 폭격기가 대규모 수송 선단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독일의 파일럿들이 마주한 것은 수송단과 그리고 영국의 전투기 대대였습니다. 영국의 공군 소속 5개의 전투기 대대가 독일 전투기들을 맞이해 주었고, 독일 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공군의 작전을 미리 안 것처럼 영국 공군들은 이미 하늘에서 스핏파이어를 선두로 독일의 전투기들을 압박하였습니다.


그날 독일은 영국의 함선을 한 대 파괴하였지만, 10대의 비행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공군은 이 전투로 인해 영국 전투기의 너무 빠른 대응에 혼란을 느꼈으나 괴링의 정보부를 이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습니다.

괴링의 오만한 자신감은 히틀러에게도 감화가 되어 히틀러는 7월 16일 바다사자 작전을 명령합니다. 독일은 50만 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킬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 해협의 바지선들은 개조를 시작하였고, 공수부대는 다시 주요 지점에 침투를 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의 처칠이 본인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7월 19일 히틀러는 처칠에게 본인과의 협상을 하거나 독일의 침공을 맛보아야 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냅니다. 그러나 처칠은 1시간도 되기 전에 거절합니다. 처칠은 히틀러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주어 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체임벌린이 아직 총리 시절 때부터 처칠을 언제나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정치가였고, 체임벌린의 실수를 본 처칠은 히틀러를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본인과의 협상을 거절한 처칠과 폴란드의 침공에 선전포고를 한 영국을 비난 하면서 침공의 명분을 만들어 앞세웠습니다. 히틀러는 괴링에게 더욱 강력한 공습을 통해 남부 상륙을 위한 제공권을 확보해 두라고 명령합니다. 1940년 8월 히틀러는 독수리의 날이라고 명명하고 영국의 모든 전투기를 파괴하라고 명령합니다. 영국의 절반 이상의 전투기들이 주둔해 있는 런던 남동쪽 비행장의 폭격 명령이었습니다.


8월 13일 독일은 약속된 승리를 맛보기 위하여 출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일 날씨가 좋지 않았고 명령이 체계적으로 파일럿들에게 전달되지 않아 작전은 연기가 되어 오후 2시에 다시 작전을 속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영국의 공군들은 준비가 되어있었고 47대의 독일의 전투기와 그리고 86명의 조종사를 잃었습니다. 드디어 독일 공군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침공 당시 큰 활약을 했던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는 활약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영국은 레이더 시스템을 통한 조기 경보 시스템을 통해 독일의 작전에 재빠르게 대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남동부의 30개 전투기 대대는 키스 파크 소장의 지휘 아래에서 독일의 공격을 방어하고 또 저항하여 큰 피해를 줬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방어에도 독일 공군은 독수리의 날을 진행하면서 피크가 지휘하던 11 그룹의 비행장 여러 곳을 타격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47대의 전투기 손실을 입은 거에 반해 영국은 겨우 13대뿐이었습니다.


8월 15일 영국 북부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75대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괴링은 연이은 작전의 실패에 영국의 방어선이 너무 튼튼하다고 느꼈고 작전을 변경합니다. 그는 레이더 기지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고 8월 16일 84대의 슈투카 폭격기들과, 214대의 Bf109 그리고 43대의 Bf110의 호위를 받으며 사우샘프턴으로 향하였습니다.


8개의 영국 비행대대가 포츠머스와 리온솔렌트에서 적을 요격했지만 너무나 많은 적의 공세에 영국은 압도되었고, 슈투카는 적진을 다시 한번 불태웠습니다. 와이트섬 벤트너에 잇던 체인 홈 레이더 탑은 무력화되었고 주위 비행장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점 방어 전략의 돌파법을 배워나갔습니다. 은밀 기동을 통하여 레이더의 탐지 범위 아래에서 비행하여 비행장에 피해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8월 18일 영국은 독일과의 전투에서 42대가 격추되었고 독일은 71대의 손실을 입었으나 영국에게는 더욱 뼈아픈 전투였습니다. 독일 지속적으로 영국의 비행장을 공격하였습니다. 조종사들은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고, 야간 폭격 그리고 비행장의 파괴 정비와 보급의 문제가 이루어져서 영국은 방어를 해나갔지만 그 피로가 점점 그들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괴링은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정보부의 보고와 달리 영국 공군은 아직도 제공권을 독일의 공군에게 넘겨주지 않았고 독일의 피해 역시 컸습니다. 그는 더욱더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에 대한 폭격을 명령하였습니다. 군 수뇌부에선 런던의 산업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히틀러에게 호언 장담했던 영국 공군의 궤멸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의 오만과 불안이 런던 공습에서 오는 이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간은 물론 야간까지 영국을 압박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8월 25일부터 30일까지 영국 파일럿들의 피로와 손실이 막심해졌습니다. 괴링은 낮 동안의 정찰 및 폭격을 하였고, 야간에는 정밀 유도 폭격 대신 대량 투하 방식으로 피해를 주었습니다. 영국의 11대대 비행장의 피해는 막심했고, 교대 및 정비 문제와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공군은 남부의 제공권을 점점 상실하고 있었고, 방공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괴링은 완벽한 제공권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영국남부에서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나 영국의 처절한 저항은 제공권을 상실하더라도 이어졌습니다. 공군은 지속적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히틀러는 괴링의 성과에는 만족을 하지 못했습니다.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영국 본토 상륙 작전)의 연기를 명령했습니다. 그 대신 영국 해협에 들어오는 보급망의 차단을 명령하였고, 독일 해군의 U보트와 독일 공군은 합동 작전을 통하여 영국의 보급망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9월 11일부터 20일까지 독일 공군과 해군의 연합으로 영국의 보급망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영국 해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독일 해군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영국 남부의 제공권 상실로 영국 해군은 슈투카의 폭격에 피해를 받았고 만만치 않은 피해에 영국의 해군도 점점 인근 해협의 방어를 중심으로 운영되게 되었습니다.


“슈투카의 하늘을 찢는 나팔이 도버해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남부와 해협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대서양 수송로의 고립과 남부 제공권의 일부 상실은 영국 국민의 결사 항전의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격렬한 방어에 공군과 U보트 역시 큰 피해를 받게 됩니다. 1940년 10월 18일 괴링은 대규모의 폭격을 다시 한번 시도하지만 날씨의 악화 및 독일 파일럿들의 극심한 피로 그리고 영국 파일럿들의 결사항전으로 인하여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63대의 전투기를 잃었고, 수많은 파일럿들이 실종 혹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의 해양 봉쇄로 작전을 변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칠 역시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대서양의 봉쇄로 사실상 서유럽 전선의 붕괴가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40년 12월 처칠은 대서양 넘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1941년 3월 11일 미국의 의회는 무기 대여법을 통과시키고 지원을 하였으나 일부 대서양의 해협은 독일의 U보트와 공군이 있었고 본격적인 지원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괴링과 같이 승리의 축배를 마셨습니다. 실질적인 서유럽 전선의 붕괴를 만들어 내었고 영국 역시 영국 근해와 본토의 결사항전일 뿐 공세능력의 상실로 인하여 그 회복 전까지 영국을 압박하여 일방적인 평화협정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두 인물의 오만은 하늘을 찔렀고 미국의 랜드리스 통과의 소식을 듣더라도 그들 역시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는 프랑스와 같은 겁쟁이들이라 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승리에 대한 집착은 영국의 공세능력의 침몰로 인해 오만으로 바뀌어 갔고 점점 본인의 군사적인 능력을 과대 평가하며 군의 작전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괴링 역시 히틀러에게 인정을 받아 그저 알프스로 휴가를 가거나 미술관에 가서 미술품을 사들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간 폭격이 시작되고 제공권은 일부를 잃어 남부에서 나치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국민과 병사들 그리고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니다. 영국 내부 일부 정치인들은 히틀러와의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는 처칠을 지지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에게 그리고 영국의 군인들에게 그리고 나치의 진군을 막고 있는 공군에게 아직 덩케르크 작전 이후 그의 말은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때문에 영국은 독일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린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장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 덩케르크 작전 직후 처칠의 연설 중 일부


영국이 이런 다짐을 하고 있는 한편 히틀러와 괴링은 프랑스의 점령에 큰 공헌을 한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능력을 얕보았고, 영국을 압박하여 서유럽의 완전한 나치의 깃발이 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동방의 곰은 붉은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했고 서방의 흰머리 독수리는 눈을 번뜩이며 사막을 가로지르며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실제 역사적인 사건과는 무관한 저의 상상력이 들어있는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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