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의 역사 시리즈 1부

by kim

히틀러는 1939년 8월 23일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독재로의 길


1933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일명 나치당의 총수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취임이 되고 그해 3월 23일 수권법이 통과가 되며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합니다. 1934년 파울 본 힌덴 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대통령직을 차지하였고 8월 19일 국민투표를 통하여 총리와 대통령직의 병합 즉 총통의 자리에 올라 나치 독일이 완성됩니다.


그 후 대공황 당시 히틀러는 국가 주도의 군수산업을 포함해 중공업, 그리고 아우토반의 건설 산업을 활성화하여 막대한 실업 문제를 해결하였고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됩니다. 히틀러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을 경험한 뒤, 독일을 재건하고 세계 강국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나치즘의 이념을 확립했습니다. 그의 이런 사상을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세뇌시킨 건 괴벨스의 폴크스엠펭어(국민라디오)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치를 탄생시키게 한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과 독일인의 분노



당시 독일의 가구당 라디오 보유 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았고 나치당의 괴벨스는 국민들을 빠르게 세뇌시켰습니다. 독일인들에게 굴욕의 평화라고 생각되는 베르사유 조약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히틀러의 연설과 괴벨스의 세뇌는 굉장히 효과적이었고,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나치당의 정책들을 이행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 베르사유 조약의 목적은 인류에게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영구적인 증오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그 결과는 불가피했습니다. 정의가 마침내 힘에 굴복하면, 영구적인 불확실성이 정상적인 국제 관계의 흐름을 방해하고 저해합니다.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세계는 침해당한 국가의 노예 노동으로는 재건될 수 없다는 사실, 이는 모든 국가가 상호 신뢰 속에서 협력해야만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 그러한 협력의 기본 전제 조건은 전쟁 정신병의 제거라는 사실이 완전히 망각되었습니다..”- 1933년 10월 14일, 히틀러의 국제연맹 탈퇴 선언 라디오 연설 중에서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인 독일에게는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겨우 10만의 군대, 막대한 전쟁 보상금, 잃어버린 일부 영토, 모든 책임이 독일에게 있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태도는 독일인들에게 굴욕과 깊은 분노를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굴욕적인 조약이었을 뿐 독일의 전쟁 능력을 완전히 제한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선동을 당하며 그동안 쌓아놨던 민주주의를 다시 독재의 체제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국민의 깊은 분노를 이용하여 1925년 독일의 외무장관이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채결한 르카르노 조약으로 가입한 국제연맹에 1933년 탈퇴를 하게 되고 1935년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라인란트 재무장, 히틀러의 첫 도박


재무장을 하게 된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비무장지대가 된 라인라트 지역 옛 독일의 동부 영토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내부에선 재무장에 대한 열망이 극도로 높아져있었지만 독일 정부에서는 프랑스의 반응을 걱정했습니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군부에서도 만약 프랑스가 행동에 나서면 군대를 빼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도 영국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의 침략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히틀러의 움직임에 대해 선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36년 3월 1일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3월 7일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만 명의 독일 군은 라인강을 건너 비무장지대에 입성하기 시작하였고, 2만 7천 명은 라인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주둔하기로 하였다. 당연히 프랑스가 움직이면 비무장 지대를 벗어나기로 했지만 프랑스는 독일의 군대를 과대평가하여 움직이지 않은 오판을 내렸고, 히틀러의 도박은 성공을 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합병 – 인슐루스


도박의 성공으로 히틀러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더욱 과감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히틀러는 결국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을 하게 되고 독일의 국민들은 그가 정말 독일의 구세주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 서방세계 즉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공격성을 인지하지 못하였고 히틀러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합병을 하였습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 합병 당시 히틀러의 슬로건


체코를 향한 야망과 뮌헨의 굴욕


히틀러의 총구가 이제 동부의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서방 세계는 위협을 느꼈지만 아직 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다 아물지 못하였기에 전쟁에 대한 공포가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있었고 서방 세계의 지도자들도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은 3번이나 독일에 방문하여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설득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1938년 9월 29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독일의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제한 채 협정을 맺습니다. 정확히 베르사유 조약으로부터 18년이 지난 이후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게 넘겨주는 대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멈춰달라는 협정이었고 히틀러도 말뿐인 이 협정에 사인을 하면서도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을 하게 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평안히 주무십시오.” -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 뮌헨 협정 뒤에 다우닝 10번가에서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개별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었고 그는 히틀러가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히틀러는 약속을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는 서부의 영국과 프랑스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동유럽의 전쟁에 그들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오히려 나치당을 만들 때부터 적으로 간주한 소련이 움직일까 두려웠고 1939년 히틀러는 소비에트의 서기장 스탈린과 협상을 하기 원했습니다.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아군 – 독소불가침조약


조약은 꽤 급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영국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서기장 스탈린은 서방의 세력을 믿지 못했고 그들의 느린 협상의 속도는 점점 더 그의 마음이 히틀러의 제안에 쏠리게 만들었습니다. 히틀러는 동유럽을 소련과 나누고자 하였고 스탈린의 생각에도 그의 제안이 더 달콤했습니다.


1939년 8월 23일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의 모스크바로 들어가 밤늦게까지 협상을 하였고 스탈린이 직접 배석해서 조약을 성사시킵니다. 서방의 국가들은 이 조약에 혼란과 공포를 느끼고 폴란드의 서부와 동부로 들어가는 독일과 소련의 모습에서 히틀러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건,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조약이 진심이었다면?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20세기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다음 장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게 됩니다. 광기와 악의 진격은 이제 시작하였고 피가 강처럼 흐르고 광기와 비극은 곳곳에서 울려 퍼집니다. 예리코의 나팔(독일의 주력 전투기 스투카의 사이렌)이 전장의 하늘을 찢으며 울려 퍼집니다.


출처 - William Orpen - The Signing of Peace in the Hall of Mirrors, Versailles (1919)

Image courtesy of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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