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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Jul 31. 2022

69세

두 겹의 편견을 뚫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서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녀는 수영을 한다. 구민체육센터 같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규칙적으로 수영을 해 왔다. 그녀에게 수영은 건강을 유지하게 돕는 수단이자 오랜 취미이며 일상이었다. 물속 세계는 고요하다.      


효정은 물속처럼 고요하고 정결하다. 영화 ‘여자, 정혜’의 정혜가 늙으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 말처럼 그녀는 나이를 뜻하는 두 자리 숫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녀는 그녀일 뿐이다. 오랫동안 돌봄 노동에 종사해 온 효정은 딸과 관련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딸과 연락 없이 지내는 그에게 닥친 일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같이 사는 동인이 유일하다. 


영화는 노인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고정관념을 돌아보게 한다. 효정은 일부 젊은이들이 말하듯 ‘틀딱’에 민폐이며, 지상에서 사라졌으면 좋을 인종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가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은 육체가 불편한 신호를 보낼 때뿐이다. 관절이 약해져서 할 수 있는 운동의 종류가 줄어든다는 정도의. 

효정은 옷을 잘 입는다. 영화 말미 그녀 자신의 말로 드러나는 바에 따르면, 효정의 남다른 패션 감각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 장치이다. 그녀는 형사에게 묻는다.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


효정은 과거 자신이 간병을 해 줬던 동인의 집에서 산다. 둘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 대한다. 동인의 아들 역시 드라마에 나오는 익숙한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한때 간병인이었던 여자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건 아버지의 삶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버지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아들의 의무감을 상당 부분 덜어줬을 수 있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혼인신고가 되지 않은 동거였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다. 


고소장을 접수하는 경찰의 태도와 눈빛은 여성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법원은 구속영장을 여러 번 기각한다. 가해자의 주장대로 합의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어렵고, 사건의 내용이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는 여성 노인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무심함을 넘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의 노화는 어느 정도 사건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효정은 손목에 멍이 들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아무도 없는 밤의 물리치료실에서 젊은 남자의 완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성범죄자들은 항상 힘이 약한 대상을 목표로 한다.


영화는 그래도 조심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이제까지 성폭력 피해자는 범죄 피해자인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야 했는데 효정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다. 그건 세상 모든 피해자를 향해 감독이 전하는 위로의 한 방법일 것이다. 피해자에게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발화 자체가 중요하니까. 성범죄 피해자들은 자주 스스로를 살해하고 2차 가해를 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이 영화는 어느 정도는 판타지이다. 영화는 실화에 기반했는데 실제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자살했다. 그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결혼을 앞둔 딸을 둔 어머니였고, 오랫동안 한동네에 살며 이웃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경찰 조사와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해자인 그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시달렸으며, 남편과 자식들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가해자는 영화에서와 달리 자기 생활을 하며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이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물속 세계는 고요하다. 투명한 물밑으로 청색 타일이 청결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속도로 헤엄을 친다.  그녀가 지나간 수면 위로 기포가 올라온다. 천천히 움직이는 팔다리. 호흡을 할 때 단속적으로 들리는 소음들은 불안을 몰고 온다. 익숙한 감정이다. 그녀가 세상에 있을 때 늘 겪는 감정. 그녀는 잘못이 없다. 자기 존재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까 항상 조심했을 것이다. 옆 레인 사람에게 물이 튀지 않을까 천천히 길게 헤엄치듯이. 

그녀는 같이 수영하는 여자들이 나이와 맞지 않는 처녀 같은 몸매 운운할 때도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자기 몸이 불온한 어떤 것으로 비치는 것 같아서. 세상은 물속 세계처럼 안전하지 않다. 어지러운 소음으로 가득하며 타인을 무례하게 침범한다. 늙은 몸이라고 쉬운 대상으로 보는 세상이다. 그녀는 늙은 사람에 여성이라서 두 겹의 편견에 갇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수영하는 동안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몸에 새겨진 폭력의 기미를 잊을 수 있었을까. 영화 너머에서도 그녀가 당당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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