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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Jul 21. 2022

경아의 성장 드라마

영화 <경아의 딸>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이 때문인지 딸을 둔 엄마라는 입장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경아의 편에 서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아도 딸 연수의 나이였을 때가 있었다. 

연수의 서사를 보다 보면 어린 연수가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엄마의 엄마 같았던 딸.  


경아를 보면서 답답했다. 남편에게 자주 폭행을 당하고 동네에 소문이 나고 피해자인 자신을 향하는 손가락질을 감당하면서 언젠가부터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는 여자. 왜 아빠랑 이혼하지 않았느냐는 딸의 말에, 너희 아빠도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이제 세상에 없는 가해자를 변호해 주는 여자. 무기력이 내면화된 여자. 

그녀는 남편이 ‘고맙게도’ 남겨준 인천의 낡은 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있다. 연수는 그 집이 싫다. 집은 경아의 신산한 삶을 오래 지켜봤다. 시간이 흘렀어도 모녀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무겁게 괴어 있다.     


경아에게 연수는 고맙고 자랑스러운 딸이다. 그런 한편 부서질까 두렵고 아까운 딸이다. 잘 자라서 어른이 된 딸을 보는 모든 엄마는 딸이 자랑스럽다. 그녀는 자신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어쩌면 희미한 질투도 담겨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젊어서 누려보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도.    

 

연수에게 경아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남편에게 폭행당한 후 바닷가에 서서 외롭고 처참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는 경아에게 다가와 약을 발라주는 어린 딸이었다. 부모 자식 간에 감정의 역전은 부자연스럽다. 

오피스텔로 이사 간 연수와의 영상통화에서 경아는 욕실과 복도까지 보여달라고 한다. 남자가 와 있지 않은지 감시하기 위해서다. 성인이 된 딸에게 그런 행동은 경아 또래인 내가 봐도 도를 한참 넘은 것이었다. 가볍게 웃어넘기며 엄마의 요구에 응하는 연수도 마음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낀다.


딸의 첫사랑이었던 남자도, 최근에 헤어진 남자친구도 경아는 알지 못한다. 엄마가 과민하게 반응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연수는 경아에게 남자친구의 존재를 숨겼다. 경아에게는 연수가 사고 없이 조신하게 지내다가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일이었다. 모녀가 친구처럼 지내고 많은 것을 공유하는 일은 이래서 어렵다. 딸에 대한 사랑이 걱정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딸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의 삶을 바라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딸의 입장에서는 엄마를 친구처럼 여기기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나를 포함한 엄마라는 존재들은 딸을 짝사랑하게 되어 있나 보다.     


엄마도 한때 삶에 서툰 사람이었다. 엄마가 되기 전 새로운 역할에 대한 수업을 받은 적도 없다. 그건 이런 담론이 생기기도 전, 먼 옛날로 갈수록 더 그랬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몸담은 시대와 사회의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땅의 여성들은 가부장제라는 인습의 질곡에 빠져있었다. 몸에 새겨진 관념과 억압은 불안을 낳고 그것은 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경아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모르긴 해도 그녀 역시 원죄처럼 무거운 죄책감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남성 앞에서 순종을 넘어 굴종하며 끝없이 인고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감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경아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당했다. 이유가 있으니까 맞았을 거라는 세간의 편견에, 외도에 대한 의심까지 받아야 했다. 가까운 친구마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봤다는 걸 경아는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경아는 맞서서 대응한다는 건 꿈도 못 꾸고 자기 안으로 숨어들었다. 세계에서 주입한 가치를 자기 것으로 내면화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자신을 침해하는 세상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렇게 평생을 ‘내 탓’이라는 말로 회피하며 살아왔다. 그런 경아에게는 세상 자체가 폭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을 과잉보호하는 강박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딸 연수는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다. 거기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직업도 가졌다. 그러나 오랜 세월 자기 몸에 새겨진 피해의식과 두려움은 딸에게도 신경증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그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딸 연수가 큰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경아가 젊었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는 일이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연수의 의지에 반해 스토킹에 가까운 행동을 하자 냉정하게 끊어냈는데, 그 후 두 사람이 한창 사랑할 때 찍은 동영상을 경아와 친구에게 보낸 것이다. 경아가 제일 두려워했던 일이 가장 가공할 만한 방식으로 일어난 것이다. 착하고 모범적인 딸 연수의 영상을 본 경아는 경악한다.     

급기야 경아는 딸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만다. 걸레가 따로 없더라. 그 말은 바로 자신이 들었던 말이다. 송곳처럼 아프게 자신을 찔렀던 말. 그 독한 말을 가장 사랑하는 딸을 향해 뱉다니. 경아는 자기 안의 두려움에 갇혀 딸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연수가 연락을 끊고 칩거한 후 경아는 경아대로 딸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된 경로를 되짚어간다. 남자의 가족을 만나고 소송에 대해 알아보며. 처음으로 딸과 떨어져 혼자 있으면서 그녀는 딸의 삶을 되짚음과 동시에 자신에 삶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경아는 연수가 남자친구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버렸던 것처럼 남편의 물건을 모두 모아 쓰레기장에 버린다. 그리고 이사를 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에게 종속된 삶을 살았던 그녀는 이제 당당히 독립을 선언한다. 딸을 통해 자기 안의 묵은 상처를 대면하고, 딸이 같은 상처를 지니고 살지 않게 더 단단한 심지를 가진 엄마로 태어나기를 시도한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엄마인 경아의 성장 서사로 읽혔다.     



영화의 제작 의도는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주려는 것이 더 컸는지 모른다. 디지털 성범죄가 한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현실이 맞는 것인지 묻는다. 서로 사랑했던 한때 둘만의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해서 한 존재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연수의 전 남친이나, 타인의 사적인 영상을 좋다고 감상하며 다운 받고 퍼뜨리는 이들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경찰 조사에서 연수는 머뭇거린다.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동영상을 합의 하에 찍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주 위축된다. 성범죄에서만은 가해자의 명백한 잘못보다 피해자의 완전무결함을 문제 삼는다.  

   

사과하는 경아에게 연수는 말한다.      


엄마 탓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학교도 그만두고 고시원 원룸에 자신을 유폐시킨 연수는, 계속 계약 연장 의사를 물어 오는 디지털 장의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설학원 강사가 되어 온라인 수업을 한다. 온라인 수업에서조차 얼굴 공개를 꺼리던 연수는 자신을 따르는 첫 번째 제자인 하나를 용기 내어 만난다. 왜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하나에게 연수는 말한다. 교실에서 자신만 바라보는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하나는 성관계를 요구하는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고, 연수는 자신의 첫 경험을 들려주며 엄마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영화 말미, 경아는 연수의 오피스텔에서 가져온 노트북을 켠다. 액정이 깨진 것을 수리해서 보관해 오던 것이다. 연수는 끝도 없이 올라오는 영상을 삭제하다가 절망해서 주먹으로 액정을 깨뜨렸다. 열어본 사진 파일에는 연수의 밝은 얼굴들이 가득하다. 경아의 얼굴에 봄볕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사진 파일을 닫은 뒤 바탕화면 맨 끝 이름 없는 수상한 동영상 파일을 발견한 경아의 얼굴이 굳어진다. 조심스럽게 클릭을 하자 그 속에는 오피스텔에 이사한 직후 남자친구와의 행복한 한때가 담겨 있다. 연수는 그저 한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한 만큼 믿었을 뿐이다. 다음 영상에는 교사가 된 뒤 학생들 앞에서 할 첫인사를 연습하는 연수의 들뜬 얼굴이 있다. 경아는 마음이 아프다. 여전히 예쁘고 착하고 성실한 딸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한편 연수는 이력서를 들고 벚꽃이 만발한 도로의 건널목 앞에 서 있다. 건너편에서는 연수가 시선의 두려움을 느꼈던 학생들이 벚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연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을 응시하며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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