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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Jul 05. 2022

국수의 세계

내가 가 본 서울과 부산의 국숫집

하나. 체부동 잔치집     


서울에서 친구와 함께 ‘체부동 잔치집’이라는 식당에 갔다.

이곳은 일단 회전율이 빠르다. 비좁은 출입구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보며 대기 시간이 길어질까 지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밀려드는 손님만큼 빈자리도 빨리 난다. 그 비결은 음식이 빨리 나온다는 데 있다. 우리도 안내를 기다리지 않고 빈자리가 나자 냉큼 마음에 드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내가 넓은 편은 아닌데 좌석 수는 꽤 많다. 좁은 통로로 음식을 나르는 이모님의 몸짓이 재바르다. 이곳에서는 사장님도, 서빙하는 아주머니도 보여주기 식 친절을 추구하지 않는다. 불친절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과한 친절을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은 가게 벽에 묻은 손때만큼이나 오랜 세월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푸근한 마음이 든다.


음식들이 안주를 겸하는 메뉴이다 보니 술과 같이 주문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퍼질러 앉아 술주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큰소리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온 음식에 대해 예의를 갖추듯 맛있게 먹고 저마다 밝은 얼굴로 한담을 나누고 그릇이 비면 바로 일어선다. 음식이 순하면 그것을 먹는 사람들도 따라서 순해진다.


우리 테이블 옆에는 7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노인 세 명이 앉았는데, 수줍은 여고생처럼 얌전하고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국수 그릇이 비자 바로 일어났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서민들이 부담 없이 들러서 빈속을 채우는 이웃의 식당. 유명 맛집이 대개 그렇게 하듯 연예인, 정치인의 빛바랜 사인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으나, 그것이 꼭 전시효과로만 보이지 않았다. 다양한 필체의 사인들을 둘러보다가 그 집과 가장 어울리는 이름을 찾았다. 노회찬.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국숫집 사장님에게 소탈하게 말을 걸고 노동자들과 막걸릿잔을 부딪치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착한 가격에 한번 놀라고 넉넉한 양에 또 한 번 놀라며 마지막으로 집에서 먹는 것 같은 순한 맛에 놀라고 나면 안심이 된다. 국수도 부추전도 집에서 한 것 같은 맛이었다. 겉멋을 부리지도, 담음새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도 않되 건강한 맛. 속살이 찔 것 같은 맛이었다. 마음의 살까지 도도록하게 찔 것만 같은. 서울 사람들이 인왕산을 오른 뒤 맛있는 안주에 막걸리 한잔하며 등산을 마무리하는 곳이라고 한다.   

       



둘. 거기가면 

     

물국수는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일단 국물이 맛있어야 한다. 인공조미료로 성급하게 낸 얕은 맛이 아니라 자연 재료들을 오래도록 우려낸 깊은 맛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고명이 올려져 있어야 한다. 고명에 어묵하고 단무지가 들어가면 나는 마음이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새파란 부추와 채 썰어서 살짝 볶은 애호박, 양파 같은 채소에 계란 지단이 얌전하게 올라가 있으면 좋다. 거기에 적당한 양의 양념장을 살포시 올린다. 모든 음식 맛에 있어서 소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듯이 국수 맛의 화룡점정은 양념장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모든 양념장 만드는 데에 자신이 없다. 그런데 어묵과 단무지 고명이 들어간 국수에 대한 선입견을 시원하게 날려버린 곳이 있다.    

 

부산에서 국수, 하면 떠오르는 가게. 상호가 ‘거기가면’이다. 원래는 온천장에 있던 친구 사무실에서 식물원을 향한 골목 오르막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10평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식당 안은 정리가 잘 되어 깔끔했다. 정갈한 국수 맛처럼. ‘사람은 머리로 말하고 국수는 국물로 말한다.’ 같은 문구가 액자 안에서 엄숙하게 내려다보고 있고 그 옆에는 만화가 허영만의 사인이 붙어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 집이 영원히 티브이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기를 기원한다.


원래 가게가 있던 동네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면서 점포들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닫고 나갔다. ‘거기가면’ 국숫집도 금정구청 근처 식당 골목으로 이사했다. 내리 기장 근처로만 나들이를 가다가, 문득 나무와 꽃들이 궁금해져서 친구와 화명수목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작심하고 ‘거기가면’을 찾았다. 멸치국수와 왕만두를 주문했다.

예전 가게 손님들은 단골이 많았고 연령층도 다양했는데 옮긴 곳은 확실히 젊은 직장인이 많아 보였다. 위치가 좋아서 매출이 전보다 늘었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출 상승과 상관없이 사장 부부는 예전 그대로 친절했다. 사장이자 셰프인, 가히 국수 장인이라 할 만한 사장님은 여전히 흰색 조리복을 입고 더 넓어진 주방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다. 그릇을 내려놓으며 “맛있게 드십시오.”라고 허리 숙여 깍듯이 인사하는 것까지 변한 데가 없었다. 재즈 음악이 실내를 잔잔하게 채우는 것도 같았다. 그중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은 역시 국수였다.


맛있는 국수는 면발부터가 다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맞는 면의 탄력성. 흡사 AI가 만든 것 같이 언제 가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면 상태. 면을 삶을 때 타이머를 맞추나. 오랜 세월 국수를 삶다 보면 손끝으로 아는 거겠지. 삶아낸 면을 흐르는 냉수에 열심히 치댔겠지. 주방 쪽을 곁눈질한 바에 의하면 둥글게 말아 올린 면을 그릇에 담는 손길까지도 특별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국수의 모습은 정갈하다. 면의 양은 적지도 많지도 않다. 먹고 나면 딱 적당한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거기가면’ 국수는 액자 속 문구처럼 국물로 말한다. 진한 멸치국물이다. 빛깔부터 짙다. 진한 국물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것을 상회한다. 마른 멸치 몇 마리가 몇 번 헤엄친 국물이 아니다. 멸치젓국을 연상시킬 정도로 짙고 웅숭깊다. 진해서 조금 짜게 느껴질 수도 있다. 뒷맛은 칼칼하다. 맛있는 음식의 비밀이 으레 그렇듯 질 좋은 재료와 정성이 들어갔을 것이다. 국물 맛의 기본이 되는 재료이므로 모르긴 몰라도 기장쯤의 엄선한 거래처에서 공수해 온 멸치를 썼을 것이다. 진한 국물이 내장을 따뜻하게 데우면 뇌 어딘가에서 별꽃이 터진다. 고명이 많지는 않다. 부추, 단무지, 어묵, 김. 주인공은 면과 국물이다. 쉬 불지 않는 면의 그 적절한 탄성을 입천장과 혀가 느끼고 이어서 국물이 식도를 통과하면 그대로 게임 끝이다.     


다음은  비빔국수다.

건강검진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위 조영술을 할 때 걸쭉한 흰 약을 마신 뒤끝이라 속이 안 좋았던 친구는 뭔가 깔끔한 맛을 원했고, 그래서 그날은 비빔국수로 메뉴를 정했다.


비빔국수 하면 시각적으로나 미각적으로나 자극적인 빨강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제 그런 선입견은 던져버려야 한다.

동그랗게 말린 국수가 먹음직스러운 양념장 위에 놓이고 면 위로는 면발만큼 얇게 채 쳐진 보라색 양배추가 꽃 데코레이션처럼 살포시 올라가 있다. 국수도 적은 양이 아니지만 양배추, 적양배추, 오이 같은 채소를 아끼지 않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채소를 좋아하는 나는 면 반 채소 반의 식감이 좋았다. 금정산성 가는 길에 있는 ‘서문국수’의 비빔국수도 채소를 아끼지 않지만, 샐러드 재료처럼 큼지막하게 썬 채소가 먹기에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결국 남기곤 하는데, ‘거기가면’ 비빔국수 채소 고명은 먹기 좋게 썰어져서 씹어 넘기기가 수월하다. 가히 고객 배려형 조리법이라 할 만하다.

국수와 채소와 양념장을 다 비비고 보면 우선 외관상 새빨갛지 않다. 양념이 약한 게 아닐까, 싱겁지 않을까 싶게 국수의 흰 빛이 빨간 양념 색을 뚫고 올라온다. 그러나 첫 젓가락질에 감탄하게 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조화로운 맛이다. 옅은 색이 무색하게 끝에는 매운맛이 적당히 올라와서 식욕을 돋운다. 사실은 그보다 전에 후각이 먼저 맛을 인식한다. 그 정체는 참기름 향이다. 참기름 같은 기본양념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심증이 온다. 갓 볶은 깨의 고소함이 기름 고유의 느끼함을 덮는다. 양념장의 매운맛과 참기름의 고소한 맛이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룬다. 멸치국수와 마찬가지로 먹고 났을 때 양은 딱 적당하다.

잘 먹었습니다아. 영혼까지 포만감을 느끼며 우리는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섰다.    

데코레이션도 예쁜 '거기가면' 비빔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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