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국화 Sep 05. 2022

박해영 드라마의 몇 가지 키워드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 일지> 삐딱하게 다시 보기

‘나의 해방 일지’가 끝나고 헛헛한 마음에 박해영 드라마 다시 보기를 시작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드라마 다시 보기는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작업이다. 한번 시작했다 하면 몰입하게 되고 드라마의 세계관 속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려야 하니까. 그럼에도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은 박해영 월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한 세계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쳐 왔는지 궁금했다. 그리하여 시구(詩句)처럼 함축적이고 여러 번 곱씹어 보게 하는 대사를 리와인드하여 몇 번이고 듣는 다시 보기를 했다. 이전 작품은 제외하고 ‘또 오해영’과 ‘나의 아저씨’를 대상으로 했다.     



<또 오해영> 스틸컷


박해영의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는 순정적이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재지 않고 상대에게 사랑을 퍼 준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지만 그래도 나아간다. 상대방의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면.

남자는 망설이고 신중하고 수동적이고 과묵한( 구 씨를 떠올려 보라. 물론 염창희 같은 남자도 양념처럼 등장하기는 한다. ) 반면, 여자는 저돌적이라고 할 만큼 감정을 밀고 나가며 솔직하다. 그것은 아름다우며 일말의 감동마저 준다.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오해영이 그랬고 염미정, 염기정 자매가 그랬다. 불행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누가 누구 걱정을 하나 싶은 지안마저도 동훈을 불쌍히 여기며 줄곧 바라본다.     


또 하나, 남자 주인공 주변에는 의리로 뭉쳐진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남주를 무조건 신뢰하며 응원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한다. 그야말로 끈끈한 공동체이다. 그들은 회사 동료일 때도 있고 동네 친구이거나 친형제일 때도 있다. 작품에 알게 모르게 작가의 삶과 경험이 담기게 마련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작가의 주변에는 남자가 많지 않았을까 싶다. 남자 형제가 많거나 한동네에서 자라 오래된 남사친이 많거나. 뭔지 모르나 여성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면, 남성성이 많은 작가의 성향이 은연중에 드러나서가 아닐까. 선천적이거나 환경에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이경성이 분한 엄마 곽혜숙(<나의 해방 일지> 스틸컷)

 

한 가지 아쉬운 공통점은 극 중 엄마들의 위치이다. 엄마들은 주로 부엌에 서 있다. 거기가 자신의 고유한 자리라는 듯 부엌을 떠나지 않는다. 다 큰 성인 자녀들과 남편을 위해 그 자리에서 손이 불어 터져라, 음식을 하고 밥상을 차리고 밥상머리에서도 반찬 챙겨주느라 바쁘다. 오해영의 엄마도 많은 장면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서 있으며, ‘나의 아저씨’의 엄마 고두심은 별거 중인 장남과 그 나이가 되도록 독립을 하지 못한 막내아들의 밥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싼다. 심지어 ‘나의 해방 일지’의 엄마는 네 명이나 되는 성인 식구에 일꾼까지 6인분의 밥도 모자라 부엌에서 밭과 싱크대 작업장을 오가며 새참까지 내놓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기정의 말대로 그녀의 사인은 과로사가 맞다. 나는 그녀가 큰딸의 애인을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낸 그날, 푸념 끝에 잠시 누우러 간 안방에서 누운 그 자세로 유명을 달리하기 한참 전부터 그녀의 행적에 유독 눈이 갔다. 다 큰 성인들이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고 늙고 힘없는 여자 어른에게 맡기다니 너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써놓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 나도 결혼 전까지 엄마의 노동에 기대어 살았다. 반성한다. 그 결과로 결혼 후 나 한 사람뿐 아니라 두 사람, 곧이어 네 사람 몫의 뒤치다꺼리에 늘 혼란스럽고 힘겨웠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산 사람들은 살아가게 되어 있다. 가족들은 초라한 밥상 앞에서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다. 처음에 인스턴트식품으로 그녀의 부재가 남긴 자리를 헐겁게 때우던 그들은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수십 년 세월 한 사람이 했던 일들을 나눠서 하게 된다. 먹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으니 그들은 밥상 앞에서 말없이 꾸역꾸역 음식을 삼킨다. 먹는 일은 먹는 일일 뿐이다. 그녀의 존재 증명이기도 했던 그 일은 슬프게도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의 밥상은 너무도 쉽게 지워져 갔다.

물론 한 사람의 희생으로 나머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맛있게 음식을 먹는 풍경이 아름다울 수 있다. 음식을 한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행복할 수 있고 어쩌면 훗날 그 장면이 따뜻한 추억으로 소환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가 삐딱한 탓인지 내게는 여성의 노동만이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가사 일이 어렵고 음식 만들기에 자신이 없지만 결혼 초기부터 가사 노동은 내게 벅찼다. 그래서인지 젊었을 때부터 드라마 속 여자들이 부엌에서 종종거린 결과로 차려진 화려한 밥상 앞에 식구들이 모이는 장면이 불편했다. 그 한 끼가 마지막이라는 듯, 세계에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으로 둘째 가면 서러울 한식을, 재료를 씻고 다듬고 써는 과정을 지나, 불 앞에 서서 지지고 볶고 끓여 차려내면, 식구들은 그 결과물들을 30분도 안 되어 뚝딱 해치운다. 그게 끝이 아니다. 엄마들은 앞치마를 두른 그대로 설거지를 하고 식구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오래 남아 뒷정리를 하고 식탁을 훔친다. 아무도 앉은 적이 없는 것 같은 식탁은 빤딱빤딱하다. 그 장면을 카메라가 무심하게 비춘다. 부엌 한쪽에 우두커니 선 여자 배우도 같이. 김수현 드라마에서 유독 그런 장면이 많았고 그걸 보는 나는 명치께가 답답했다. 그런데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여성 작가의 드라마에서도 같은 장면을 보게 될 줄 몰랐다.     


<나의 아저씨> 포스터


하기야 ‘나의 아저씨’ 때부터 한쪽에서는 말들이 있었다. 나는 박해영 드라마 특유의 정서에 푹 빠져서 그런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다시 보기를 하면서, 처음 볼 때 막연하게 불편감이 있었으나 애써 외면한 장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우선 다들 알고 있는 폭행 장면. 사채업자들이 어린 여자아이와 노쇠한 노인에게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행사할까, 하는 건 내가 어둠의 세계에 무지해서 그렇다고 치고. 집착에 가깝게 지안을 괴롭히고 폭행까지 가하는 가해자 광일을 갑자기 어린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지안을 좋아했던 자로 그리면서, 마지막에 극적으로 지안과 동훈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이 돌아가게 하는 일등 공신으로 만든다. 그를 변하게 만든 지안의 한 마디는, 예전엔 눈빛이 지금 같지 않았다, 는 말이다. 그 말 한마디에 독한 눈빛이 거짓말처럼 풀리는, 안이한 전개를 납득할 수 없었다. 과거가 어쨌거나 현재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     


그리고 극 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동훈의 아내, 윤희에 대해 말해야겠다. 결혼 후에도 원가족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않는 남자들은 우리나라에 특히 흔하다. 윤희의 말처럼 동훈에게 가족은 아내와 아들이 아닌, 부모 형제였다. 동훈은 태생적으로 외롭고 춥고 건조한 사람이면서 배우자의 외로움은 철저히 외면했다.

고두심이 연기한 동훈 모는 K 시어머니의 일면을 보여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케케묵은 혈연주의. 그녀는 아들보다 잘난 며느리가 싫다고 한다. 며느리가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도 축하와 기쁨의 표현은 전혀 없이 어두운 표정이다. 그러면서 또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로는 잘해준다. 아들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며느리, 집안에 일이 있을 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 둘째 며느리에게 채무 의식도 없지 않을 것이어서 면전에서는 어려워한다. 그렇다. 그에게 둘째 며느리는 어려운 존재이다. 어렵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훈이 지안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의 일부라도 아내 윤희에게 줬다면 확언하건대 그녀가 외도를 했을 리가 없다. 그녀도 사랑받고 소통하고 싶었을 텐데 남편은 외로운 얼굴을 하고 속내를 쉬 보여주지 않고 퇴근하면 동네 불알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주말엔 조기축구를 한다고 집을 비운다. 둘이 같이 공유하는 취미도 없고 대화도 없다. 어쩌다 한번 윤희의 제안에 말없이 마주 앉아 캔맥주를 마시는 게 다다. 그런데도 지안은 동훈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미안함에서 나온 발화인 “뭐 사 가? ”라는 세 음절의 말을 가장 따뜻했다고 말하고, 윤희는 또 그 말을 새삼 무겁게 받아들인다.     


박해영 작가는 순수한 사랑 지상주의자인 한편으로, 상당 부분 가부장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서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부재하는 것과 대비되어 박해영 작가의 아버지들은 과묵하나 선하게 그려진다. 반면 어머니는 부엌에 맞춤화되어 있다는 것 외에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사근사근하지 않으며 입이 걸고 자식들에게 좀체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나 속은 나무 난로같이 따스하고 웅숭깊다.    

  

<나의 해방 일지> 포스터


그 외에 작가는 직장생활의 애환을 잘 아는 듯하다. 직장생활 경험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직장 내 풍경을 세밀화처럼 그린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대체로 여자 직원들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이다. ‘또 오해영’에서 예지원이 분한 박수경이 그나마 회사의 임원으로 나오는데 주요 캐릭터라 그런 자리를 준 것 같고. 게다가 여자 직원들은 대개 몰려다니며 말을 만들거나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살아가는 일의 지루함과 사람을 대하는 일의 피로가 아닐까 한다.

작가는 살아가는 일의 지루함에 대해 반복해서 말한다. 동훈은 아예 지구에 잘못 태어났다고, 자신은 성실한 무기징역수라고 말하며, 지안은 자기 나이가 3만 살은 된다며 왜 자꾸 태어나는 걸까,라고 말한다. 염 씨 3남매에게도 살아가는 일은 견딜 수 없는 지겨움이다. 매일 왕복 세 시간 길을 꾸역꾸역 출퇴근하는 행위처럼.

또한 박해영의 인물들은 자주 사람을 대하는 일의 피로에 대해 말한다. 구 씨에게만 그런 어려움을 토로하는 염미정이 있고, 직장 동료 한 사람에게서 유독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염창희가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이다.

급기야 염미정은 자신과 닮은꼴인 몇몇 직장 동료에게 해방 아이템을 제안하고, 그 구성원들은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조직을 경험하게 된다. 조직의 이름은 해방 클럽이다.

         




                     

작가의 이전글 점을 보러 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