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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May 16. 2022

퍼스트 카우

이렇게도 사랑스러운

      

감독 : 켈리 라이카트  

출연 : 존 마가로, 오리온 리     


     

어떻게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영화를 보고 난 후 예상한 대로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였다.

때는 19세기, 초기 서부 개척 시대. 미대륙 서북부의 오리건주. 이른바 골드러시로 금과 물질을 좇아 많은 이들이 미개척지인 서부로 향했다. 그 속에도 권력과 부를 가진 이가 있고 물질을 움켜쥐려고 애쓰는, 무지렁이에 가까운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기존의 서부 영화는 테스토스테론으로 똘똘 뭉친 남자들이 등장한다. 무법지대 같은 황야를 배경으로 그들은 멋진 영웅으로 그려진다. 그들의 적은 오래전부터 그 땅에서 살아왔던 인디언, 아니면 무법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티브이에서 방영되던 서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먼지 이는 황야, 말을 타고 총을 찬 남자들. 허리춤에서 총을 빼 들고 찰나의 순간에 상대를 향해 총을 발사한 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서 가는 장면들. 그런 게 왜 멋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영화의 포스터만 보고 눈길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의 전당 할인 이벤트 기간에 보고 싶었던 영화를 웬만큼 다 보고 나서야 에스컬레이터 옆 대형 포스터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포스터 상단에는 영화제 수상을 알리는 문구가 있었다. 거기다 꽤 오랜 시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던 딸과 흐지부지 화해한 뒤 뒤늦게 영전에서 감상한 영화 후기를 주고받다가 ‘퍼스트 카우’가 제일 좋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시끌벅적한 총격전도, 사내들의 거친 싸움도 찾을 수 없다. 주인공 쿠키(이름 또한 얼마나 귀여운가. 사냥꾼 무리가 붙여준, 비하의 의도가 들어간 별명이지만 그가 일행의 끼니를 책임진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맞춤한 이름이다. )가 서 있는 뒤로 투덕투덕 싸우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 정도이다. 

스크린에 빛이 들어온 뒤 낯설었던 것은 늘 봐 오던 화면 비율이 아닌,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 비율이었다. 정확하게 1.37대 1의 화면이라고 한다. 그 좁은 화면의 왼쪽 끝에서 거대한 화물선이 느리게 움직인다. 강에서 숲으로 장면이 바뀌면 개 한 마리가 검고 축축한 흙에 코를 갖다 대더니 앞발로 흙을 판다. 그것을 본 견주 여자가 이어서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한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건 백골의 두개골 부분이다. 곧이어 나란히 누운 두 구의 백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댄 자세로. 백골을 발견한 여자나 관객 모두에게 그 장면이 공포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궁금증을 자아낼 뿐. 동시에 두 사람의 사연이 영화의 줄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어서 카메라는 노란 식용 버섯을 따는 남자의 손을 따라간다. 버섯을 따는 손길은 주의 깊고 정성스럽다. 몸이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도마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남자는 그 작은 동물을 뒤집어서 그 자리에 가만히 놓아준다. 그 장면이 예기치 않은 감동을 준다.

쿠키는 사냥꾼 무리를 따라다니면서 식량 조달과 취사를 책임지고 있다. 그의 본명은 오티스 피고위츠. 피고위츠라는 성에서 짐작이 가능한데, 그는 유대인이다. 전형적인 남성성을 갖춘 무리에게 쿠키는 우습게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쿠키는 전통적으로 여자들이 주로 담당해온 요리를 맡은 인물이다. 전투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 그는 대하는 모든 대상에게, 그 대상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다정하게 대한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누군가에 쫓겨 숨어든 남자다. 그는 자신을 쫓는 러시아인들의 눈에 띌까 봐 옷을 버리고 온 탓에 벌거벗은 상태로 잡목 사이에 숨어 떨고 있다. 게다가 그는 동양인이다. 쿠키가 인디언이냐고 묻자 그는 중국인이라고 답한다. 소수자이자 주변인인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그의 이름은 킹 루이고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쿠키에게는 킹 루를 경계하는 기색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백인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 역시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다. 킹 루 역시 쿠키에게서 다른 백인에게서 받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쿠키는 곧바로 몸을 감쌀 담요를 갖다주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도 기꺼이 음식과 물을 내놓는다. 킹 루는 광둥 출신으로 무역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다 미국 땅에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왔다고 했다. 쿠키는 자신의 좁은 천막에 킹 루를 눕히고, 추위로 떠는 그를 보더니 하나 남은 담요를 더 가져와 어깨에 덮어준다. 그 손길은 어쩐지 어머니의 그것 같다. 어릴 때 아직 이불 속에서 달콤한 아침잠에 머물러 있을 때 식구들의 끼니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난 엄마가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단단히 여며 주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내 어깨께에 그 손길이 느껴졌다. 너무도 안온하고 믿음직스러워서 험한 세상을 향해 둘러쳐진 가림막 같았던 그 손길이. 



사냥꾼 무리에 끼어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한 킹 루는 다음날 강을 헤엄쳐 어디론가 떠난다. 이쯤에서 극중 킹 루라는 인물과 그것을 연기한 오리온 리에 대해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킹 루는 여러 면에서 굉장히 영민해 보인다. 영어만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려 인디언 언어까지 구사한다. 그리고 위기 상황이 오면 생존수영에 가까운 수영을 한다. 이른바 헤드업 자유형. 그는 사업가 기질을 갖고 있으며 혼란스러운 시대에 기회를 봐서 돈을 벌려는 계획이 있다. 비록 현재는 곤궁한 처지에 이방인이지만 그에게는 농장을 갖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다. 사업가 기질과 야망을 빼면 그도 쿠키처럼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더 많이 지닌 듯하다. 

오리온 리는 매력적인 배우이다. 혹시 한국계인가 해서 찾아봤는데 중국계 호주인이다. 아시안 특유의, 잘 들리는 영어 발음이 매우 부드럽다. 영리해 보이면서 차분한 인상인데 어디선가 서정적인 분위기가 난다.

사냥꾼 무리의 일이 마무리되어 독립한 쿠키는 새 부츠를 사서 신고 대지주 팩터가 관할하고 있는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킹 루는 쿠키를 자기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술을 대접한다. 불을 지피기 위해 밖에서 장작을 패는 킹 루를 보고만 있던 것이 미안했던가, 쿠키가 주섬주섬 일어난다. 흙바닥에 비질을 하고, 양탄자를 털고, 밖에 나가서 꽃을 꺾어와 병에 꽂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동거인의 관계가 이 둘만 같다면 가사노동 분담 문제로 한쪽이 억울함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우리가 처한 현실과 달리,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에 서 있어서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머무를 곳이 없던 쿠키는 그렇게 킹 루의 집에서 같이 지낸다. 장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사람. 돈을 모아 농장을 일구는 게 꿈이라는 킹 루의 말에 쿠키는 호텔을 짓고 빵집을 여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러던 중 마을에 암소 한 마리가 들어오게 된다. 마을의 첫 번째 소(first cow)이다. 소의 주인은 마을의 실력자 팩터이다. 험로에 수소와 송아지를 잃고 암소만 살아서 들어왔다. 그 소는 이름난 혈통을 가지고 있다. 팩터가 소를 들여온 이유는 차(茶)에 탈 우유가 필요해서이다. 한편 쿠키가 제빵 기술이 있음을 알게 된 킹 루는 빵을 만들어 내다 팔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쿠키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유가 필요하다고 하고 둘은 아무 하는 일 없이 팩터의 집 앞에 매여 있는 소에 생각이 미친다. 한밤중에 쿠키가 우유를 짜는 동안 킹 루는 나무에 올라가 망을 본다. 쿠키는 젖을 짜면서 소에게 조근조근 말을 건넨다. 남편과 자식을 잃어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 맛있는 우유를 줘서 고맙다, 네가 준 우유를 넣은 빵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덕분에 빵을 다 팔 수 있었다, 이런 말들을 들려준다. 거기에 화답하듯 소는 고개를 돌려 커다란 눈망울로 쿠키를 바라본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에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다.

소가 제공한, 아니, 주인 팩터 몰래 훔친 우유 덕에 빵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부르는 게 값이 되는 지경이 된다. 빵에 대한 소문은 팩터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급기야 그가 그 둘 앞에 나타난다. 빵을 맛본 그는 맛에서 고향을 느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우려하는 것처럼 빵에 우유가 들어간 것을 눈치채지는 못한다. 관객들은 아슬아슬한 서스펜스를 느끼며 밤마다 반복되는 절도 행각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게 된다. 제법 긴 런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의외의 서스펜스 때문일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다. 그들의 귀여운 절도 행위가 탄로 나고 둘은 쫓기는 과정에서 헤어지게 된다. 킹 루는 강을 헤엄쳐 가서 흥정 끝에 인디언의 나룻배를 타고 떠났고, 수영을 못하는 쿠키는 총을 겨누며 뒤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숲의 경사지에서 굴러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다. 이때 쿠키를 구해준 이 역시 인디언 가족이다. 두 사람은 각각 킹 루의 집으로 몰래 돌아오는데 이미 패거리들이 와서 분탕질을 치고 간 뒤이다. 먼저 온 킹 루가 나무 틈새에 숨겨둔, 빵을 판 돈이 든 자루를 찾아들고 뒤늦게 온 쿠키와 재회한다. 둘은 부둥켜안고 “난 네가 떠난 줄 알았어.”라는 말을 똑같이 주고받는다. 킹 루의 손에는 돈이 든 자루가 쥐어져 있으나 그 때문에 둘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주를 재촉하는 킹 루를 따라 얼마를 왔을까, 머리를 다쳐 어지러운 쿠키가 쉬어가자고 한다. 킹 루는 웃음을 지으며, 누워 있는 쿠키 옆에 앉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둘 사이에 우정이라는 게 없었다면 이 대목에서 킹 루는 쿠키를 버려 두고 떠났을 것인데. ) 돈이 든 자루를 베고 쿠키 옆에 눕는다. 쿠키의 어깨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운 자세로. 그 순간 그들은 쫓기는 이 같지 않게 평온해 보인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 시작 전 오프닝 타이틀로 올라온 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새에게는 둥지가, 거미에게는 거미줄이, 인간에게는 우정이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보는 내내 여성 감독의 시선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영화는 탐욕과 폭력이 넘쳐났던 초기 서부 개척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던 사랑스러운 두 인물을 그려냈다. 쿠키와 킹 루는 그 시대 사람들이 찾아 헤매던 금광보다 소중한 우정이라는 보물을 가슴에 품고 외롭지 않은 여정을 떠났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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