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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May 21. 2022

영화 <어나더 라운드>

알코올의 효용에 대한 고찰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퍼스트 카우’ 다음으로 극중 남성 인물들이 귀엽게 느껴지는 영화이다. 덴마크라는 나라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열정을 잃어버린 중년의 남자들이 나오는데, 네 사람의 우정이 아름답고 부러웠다. 

영화는 예고편이나 신문 영화 소개 기사에서 받은 인상처럼 가벼운 코믹물이 아니었다. 현대인의 외로움, 관계의 어려움, 우울증 같은 문제가 버무려져 있다.

영화는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할 수 있다면 삶은 훨씬 더 활기차고 용기와 영감으로 넘쳐날 거라는, 기발하면서도 그럴듯한 가설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자주 나를 오해한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한때는 나도 그렇게 오해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내가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타고나기를 위와 장이 약하게 태어났다. 적정량 이상의 알코올이 들어가면 다음 날 속이 좋지 않다. 문제는 그 적정량이라는 건데, 사실 나는 술꾼은 절대 못 되므로 무한정 부어라, 마셔라 해 본 적이 없다. 다른 말로 끝까지 가 본 적이 없다. 일각에서는 끝까지 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끝이 없다는 것으로 자의적인 해석을 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사람들이 내 주량을 과대평가하는 근거를 추정해 보자면, 다소 명랑해지는 것을 빼고는 주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얼굴색의 변화가 없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주량은 얼마 안 돼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맛있는 안주에 걸맞은 주종으로, 둘 또는 그 이상 마음 맞는 이들이 술잔을 부딪치는 행위를 좋아하고, 적당한 술이 들어가서 알딸딸해지는 기분이 드는 순간을 사랑한다. 내성적인 나는 알코올의 신비한 힘을 빌려 용기를 얻고 평소보다 다변이 된다. 더 많이 웃고 사람들에게 감정 표현을 많이 한다.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하는데 그럴 때 나는 정신이 멀쩡한데도 약간 오버해서 취한 척을 한다.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서. 

술친구도 좋아한다. 술이 들어가도 취하기 전과 똑같이 근엄한 태도를 견지하고 논리적인 언사를 해대는 사람들은 솔직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를 내려놓고 조금은 과잉된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 안에서 나도 덩달아 해방감을 얻고 웃을 수 있으니까. 술이 주는 해방감과 자유로, 나를 옭아맨 보이지 않는 규율과 사실 이상으로 어깨에 떠메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털어버릴 수 있다.     

 



신문에서 영화 ‘어나더 라운드’ 소개 기사를 본 나는 기사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바로 이거지. 혈중알코올농도를 0.05%로 유지하면 인간의 창의성과 대담성,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노르웨이 학자의 가설을 현실에서 직접 실험하기로 한 네 남자의 이야기. 검색해 보니 핀 스콜데루드(Finn skarderud)는 실존하는 노르웨이의 심리학자였고, 그 비슷한 언급을 했으나 정확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흔쾌히 자신의 부정확한 가설을 영화에 인용하고 주요 모티브로 활용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0.05%의 알코올 성분은 우리 인체에 원래 꼭 있어야 할 성분인데 그것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자신감 부족이나 무기력 등 각종 문제에 봉착한다는 이야기는 어쨌든 내 관심을 끌어당겼다.      

중년의 초입에 든 네 남자는 모두 같은 직장에 다닌다. 그 직장이란 고등학교이다. 유럽, 그것도 복지선진국인 북유럽의 학교라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는 교실에 앉은 아이들의 모습과 표정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 어느 나라이든 십대들은 비슷하다는 결론. 주인공 마틴(매즈 미켈센 분)은 역사 선생이다. 한때 유망한 학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그와 현재의 그는 몇 광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그는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수업 내용마저 버벅거린다. 아이들은 대놓고 그를 무시한다. 그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존재감이 없다. 삶의 총체적인 무기력 국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급기야 학교를 찾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항의에 직면한 날, 그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친구들의 모임이 있는 술집으로 향한다. 니콜라이의 생일을 기념한 술자리이다. 세 명의 친구, 니콜라이, 토미, 피터는 같은 학교에서 각각 심리학, 체육, 음악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니콜라이는 앞의 가설을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그들은 술의 생산연도와 제조국과 특성을 조근조근 설명하는 웨이터의 서비스를 받으며 술을 마신다.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있고, 대화가 끊긴 아내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참석한 자리. 흥도 나지 않고 술 생각도 없는 마틴은 차를 운전해서 모임에 나왔다. 술잔에 다채로운 종류의 술이 채워지는 가운데 친구들의 권유에 넘어가 결국 술잔을 들이키는 마틴. 다소 우악스럽게 원샷을 해대는 친구가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친구들은 의기소침해진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위로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마틴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남자들의 우정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들은 술의 힘을 빌려 유년의 아이들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맨 먼저 그 실험을 행동으로 옮긴 이는 마틴이었다. 이어서 다른 친구들도 실험에 합류한다.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하여 실험을 하는 데 합의한 그들은 음주 후 일어난 변화를 보고서로 작성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0.05%라는 수치를 지키고 시간도 저녁 8시까지로 제한한다. 그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근무 시간에 동료 교사와 학생들 눈을 피해 술을 마신다. 그 효과가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마틴은 역동적이고 유머러스한 수업을 펼친다. 학생들의 눈빛은 단번에 호감으로 바뀌고 그의 교실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이 복도에 울려 퍼진다. 수업 시간에 반장에게 학생들 지도를 맡기고 체육관 구석에 앉아서 건성으로 신문을 읽곤 하던, 무기력한 체육 교사 토미(토마스 보 라슨 분)는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활기차게 학생들을 코칭하며 운동장을 누빈다. 그뿐이 아니다. 반에서 따돌림당하는 아이에게 다가가 관심을 주고 챙긴다. 그 결과 축구 골대에 골을 넣은 아이가 환호하는 친구들 속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음악 교사 피터는 또 어떤가. 그는 영감이 넘치는 말로 학생들의 합창 수준을 단번에 업그레이드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한다. 



마틴은 이제 가정에서도 변화를 시도한다. 아내 애니카와는 근무 시간이 어긋나 대화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근무 시간은 핑계일 뿐이다. 둘은 대화하기를 두려워한다. 언젠가부터 관계가 병들어 가는 중이다. 마틴은 애니카에게 카누 캠핑 여행을 제안한다. 거절의 답신에도 기죽지 않고 문자에 재도전하는 그. 물론 그 모든 것은 혈중 알코올 함량이 떨어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 덕분이다. 결국 그들은 가족여행을 가게 된다. 오래 소원했던 부부와 사춘기 두 아들은 어색함이 없지 않으나 그런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부부는 그날 밤 텐트에서 관계를 갖는다. 애니카는 눈물을 흘리며 당신이 그리웠다고 말한다. 과거의 그들 자신이 그립다는 거다.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다. 지금은 행복했던 때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있고, 관계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실험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데 자신감을 얻은 네 사람은 점차 알코올 함량을 높여가기로 한다. 예의 가설은 이미 충분히 증명된 것 같은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모한 도전을 시도해 끝까지 가 보기로 한 것이다. 그다음에는 예상 가능한 결말이 기다린다. 알코올이 가져오는 해악이 펼쳐지는 것. 그 장면들을 보다 보면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을 끊기 위해 통과하는 지난한 과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들은 각종 추태를 부리는데, 그 대목에서 저게 우리나라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도 덴마크 못지않게 술을 좋아하고 술에 관대한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술집 주인이 그들에겐 술을 더 팔지 않겠다고 할 만큼 술집에서 추태를 부려도 눈살 찌푸리는 사람은 없다. 우리보다 더 관대한 건가. 그들의 추태가 낳은 결과가 반사회적인 데까지 나아가지 않아서인가. 그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선을 넘고 술은 이제 일상생활을 조금씩 붕괴하는 데까지 이른다. 니콜라이는 갓난아기를 포함해 아이 셋을 키우느라 힘든 아내의 눈치를 보기 바쁜데 급기야 이불에 실례까지 하고,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언니 집으로 가버린다. 마틴은 알코올을 과다 섭취한 상태에서 아내 애니카와 대화하던 중 감정적으로 폭발하고 그녀는 집을 떠난다. 이후 마틴은 애니카를 만나 진지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나 그녀는 차갑게 자리를 뜬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예가 토미이다. 그는 이혼하고 늙은 개와 단둘이 사는데 우울증이 있는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표가 나지 않지만, 세 명 중 가장 친한 친구인 마틴이 집을 방문해서 그를 챙겨줄 때 그의 외로움이 드러난다. 연이은 폭음은 이 친구의 우울을 더 깊게 만들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근무 시간에 음주를 하는 교사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토미는 그 사안을 논의하는 교직원 회의에 술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수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징계를 받았는지, 알코올중독이 심해져서인지 출근하지 않은 토미는 술에 취한 채 구명조끼도 없이 배를 타고 나간다. 그는 키우던 개 라반만을 배 위에 남기고 시신으로 돌아온다.

음주 상태로 근무한 사실이 발각되고, 그에 이은 토미의 죽음을 끝으로 그들의 알코올 행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제 마틴은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학생들이 좋아하는 교사 타이틀을 유지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기 그지없게. 대학 진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시험에 대한 불안과 자신감 부족으로 힘들어하는 학생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피터는 시험 당일 그 학생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방법으로 졸업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돕는다.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졸업을 하게 된 아이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차를 타고 시내를 질주한다. 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맥주병이 들려 있다. 그것은 영화의 도입부에 나온 바 있는, 덴마크 고등학생들의 과도한 음주문화를 보여주는 장면과 연결된다. 토미의 장례식 후 그를 애도하기 위해, 니콜라이의 생일 모임을 했던 술집에 있던 세 친구는 거리로 나와 졸업생들과 축하의 포옹을 나누며 격의 없이 어울려 술병을 기울인다. 이윽고 마틴은 젊은 시절 한때 배운 적이 있으나 오래 잊고 지내던 재즈발레를 멋지게 선보인다. 친구들이 부추겨도 한사코 추지 않던 춤이었다. 사실 그는 그 직전에 아내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의미의 문자를 받았다. 마틴이 이제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춤 동작이 웅변하는 듯하다. 춤추는 장면에서 흐르는 삽입곡 ‘What a life’(Scarlet Pleasure)는 그의 자유로운 춤사위만큼이나 긍정 에너지로 차 있다. 노래 선율이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을 떠다녔다.     


What a life! What a night!

What a beautiful, beautiful ride

Don't know where I'm in five

But I'm young and alive

Fuck what they are saying, what a life    

……

 

동료들과 학생들의 응원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 마틴이 바다를 향해 몸을 날리는 장면에서 화면이 정지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술 찬가가 아니라 인생 찬가였다.     

예의 가설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었다면 이 영화는 술 권하는 영화로 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영화는 영리하게 그 극단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피해갔으나, 뻔하지 않았던 것은 그 이후 술을 완전히 끊거나 알코올중독 치료 과정을 보여주는 대신에 적당한 음주를 이어가면서 술이 인생에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요소로 여전히 기능함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나는 마음에 든다. 술이 없으면 강퍅한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적당한 혈중알코올농도 유지는 글쓰기에도 유용하다고 감히 말한다. 알딸딸한 상태는 내 몸에 화학적 변화를 가져와서, 만성 자신감 부족과 실행력 결핍 증세에 시달리는 나를 조금쯤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대문호 헤밍웨이도, 내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도,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이야기꾼 스티븐 킹도 모두 술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아니, 알코올중독자였다.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시간 내내 이 영화에서처럼 음주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 에피소드는 영화에서도 언급된다. 자신감과 용기를 업그레이드시켜 준다는 술의 장점이 그대로 글쓰기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도 용기를 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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