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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Jun 27. 2022

루틴(1)

퇴직 3년차의 일상


월요일     



월요일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그리는 날이다. 

그림은 퇴직 후 꼭 배우고 싶었던 목록 중 하나였다. 나는 문화센터 팸플릿에 인쇄된 제한된 정보를 보고 수많은 그림 강좌들을 신중하게 비교한 끝에 ‘소묘 및 수채화’ 강좌를 선택했다. 연 4회 학기제로 운영되는 백화점 문화센터의 취미반 그림 강좌라는 특성 때문에 수강생은 학기마다 들쭉날쭉하기 마련이다. 그런 현실에서 신규 수강생에게 기초를 체계적으로 다져주는 수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코로나로 뒤숭숭한 상황을 무릅쓰고 개강 첫날 이젤이 무질서하게 서 있는 강의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강사는 나보다 세 살 정도 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놀랍게도 정확하게 맞혔다. 예리한 눈썰미 따위 결코 내 것이 아닌데. ) 연륜은 경력과 비례할 거라는 추정 하에서 일단 신뢰가 갔다. 그는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신규 수강생에게 다소 퉁명스러운 태도로 대했다. 우리는 강사의 지시에 따라 뭔가 고수의 분위기를 풍기는 기존 수강생들을 등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벽을 마주한 자리였다. 강사는 벽면에 정육면체 소묘 그림을 붙이더니 거두절미하고 그려보라고 했다. 당연히 그림의 기초 개념 따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최대한 비슷하게 그렸다. 그가 혀를 찼던가, 한번 스윽, 보고 넘어갔던가. 


다음으로는 선 긋기를 시켰다. 세 명의 초심자는 가로, 세로, 양쪽 대각선 네 방향으로 선 긋기를 했다. 강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촘촘하게 그은 선들 위에 다시 선을 그어 농담을 달리하도록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선을 긋고 또 그으며 연회색에서 진회색을 거쳐 까맣게 될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는 단순해서 좋았다. 연필심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촉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고 나쁘지 않았다. 열심히 선을 긋다 보니 마칠 때가 되었다. 강사는 집에서 선 긋기를 연습해 오라는 당부와 함께 4B 연필을 좀 많다 싶게 깎아오라고 했다. 연필 깎는 방법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가 내미는 견본을 보니 연필 길이의 3분의 1은 되게 나무 부분이 깎여 있었고 연필심도 저러다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길게 깎여 있었다. 그렇게 해야 손에 쥐기에 좋다나. 연필깎이 기계에 깎은 몽땅한 내 연필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두 번째 시간에는 3층으로 쌓인 택배 상자를 그렸다. 다음엔 사과 한 알, 그다음엔 사과 세 알, 늙은 호박과 과일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가지, 이런 식으로 점차 난이도를 높여 갔다. 수채화를 처음 그릴 때는 내 마음에도 물감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팔레트 위에 물감을 조합해서 원하는 색이 나왔을 때나, 갖가지 색으로 하얀 종이를 메워 갈 때가 그랬다. 

강사는 첫인상과 달리 소탈했고 의외의 유머 감각을 선보여 수강생들을 웃게 했으나 결정적인 어느 순간은 과도한 예민함을 선보여 예술가임을 인증했다. 수강생들의 실력이 천차만별이었으므로 그는 이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 대 일 맞춤 조언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서와 명암에 대한 설명은 반복해서 들어도 한동안 감이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생 때 이후 처음 잡아보는 연필이고 붓이었다. 감이 오지 않는 상태로 그냥 계속 그렸다. 재미있었다. 뭘 모르기 때문에 원본 그림과 최대한 똑같이 그리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결과물은 그럴듯해 보였다. 한글도 다 깨치지 못한 아이가 단어를 지레짐작으로 읽는 격이었다. 항상 스스로가 미심쩍고 자신이 없지만 ‘재미’가 강력한 에너지원이 돼줘서 몇 학기째 꾸준히 수업에 출석하고 있다.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 안의 자잘한 근심이나 불안이 사라진다. 그림 그리는 행위에는 흡사 명상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한두 시간이 더 주어지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늘 아쉬운 마음으로 화구를 챙긴다. 하지만 아쉬움을 달래주는 다음 일정이 기다린다. 문화센터 강의실을 나와 곧바로 7층으로 올라가면 거기 교보문고가 있다. 돌아보면 까마득한 한때, 코로나 이전에는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점령한 후 의자들은 한구석에 밀려나 층층이 쌓인 채로 살풍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코로나의 기세가 한풀 꺾인 요즘도 사정은 바뀌지 않아서, 서점 안쪽에 있는 커피숍에서 음료를 주문해야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읽기에는 도서관도 좋지만, 막 출간된 신간이나 화제작을 새 책 냄새가 날 것 같은 서가 사이에서 읽는 기분을 맛보기엔 서점이 최적의 장소이다. 좁고 긴 창이 난 벽에 붙은 자리 중 한 군데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한다. 읽고 싶었던 작가의 책이나 신문의 책 소개란에서 보고 메모해 놓은 책을 찾아와서 자리에 앉는다. 그림 그릴 때만큼의 집중도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 시간 역시 꿀 같은 시간이다. 금세 두 시간, 세 시간이 흘러 있다. 

번잡한 주말을 보내고 난 월요일은 시간을 망각한 채 자신에게 침잠하는 날이다.   

      


(※이미지 :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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