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볶음과 가지무침

by 들국화

오늘도 운동을 빠지고 늘어지게 잤다. 그 전날은 잠을 설쳐서 수면 점수가 18점이었는데 오늘은 충분히 잔 덕분에 무려 71점이 오른 89점이다. 아무래도 멀리서 비를 잔뜩 품은 구름이 몰려오나 보다. 그래도 오래 잘 자고 일어나니 몸이 산뜻하다.


어제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 가지 다섯 개와 둥근 조선호박 한 개, 상추 조금이 놓여 있었다. 남편이 주말농장을 하는 지인에게서 얻은 거라고 했다. 밥때가 지나 배가 고파오니 그 채소들이 떠올랐다. 원래도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더운 날씨 때문에 재료를 손질해서 볶고 끓이고 할 때의 열기를 떠올리기만 해도 의지가 만 리 밖으로 달아난다. 결혼 초부터 밥상에 국이 없으면 안 되는 남편은 내가 힘들어하는 게 보였는지, 몇 가지 안 되는 종류의 국과 찌개를 한 번 끓여두면 질릴 때까지 먹어야 하는 게 질리게 싫었는지, 냉동 국을 자신의 취향인 얼큰한 것 위주로 사서 냉동실에 쟁여 놓았다. 반찬은 신김치만 있으면 반 이상 만족하는 사람이라 띄엄띄엄 해놓으면 되었다.

오늘은 의무감보다 공복감이 나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공복감은 내가 좋아하는 호박볶음과 가지무침을 한번 뚝딱 만들어볼까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뚝딱은 아니고 평소 내 리듬대로 느릿느릿도 좋았다. 문을 열어놓으니 바람이 들어와서 열기도 감당할 만했다.

곧 ’윤고은의 EBS 북카페‘가 방송될 시간이라 라디오부터 켜고 시작했다. 가지는 무농약으로 키워서인지 오이처럼 가늘었고, 딴 지 며칠 지났는가 조금 시들했다. 그래도 직접 농사지은 거니 농약 걱정 안 해도 되고 무엇보다 얼마나 귀한 건가. 가지를 몇 등분으로 자르고 세로로도 한 번 잘라 찜기에 넣어 불을 올렸다. 다음으로 호박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소금을 뿌려 잠시 절여 놓았다. 그 사이 양파도 가늘게 썰고 파와 청양고추는 쫑쫑 썰어 놓았다.

가지가 잘 쪄졌는지 젓가락으로 찔러본 뒤 찜기를 놨던 자리에 볶음용 프라이팬을 올려 기름을 둘렀다. 호박을 넣어 볶다가 양파를 추가한 뒤 새우젓을 넣어 조금 더 볶았다. 마늘, 청양고추, 마지막으로 파를 넣고 불을 끈 뒤 참기름을 두르고 통깨를 뿌렸다. 쪄 둔 가지를 넓은 그릇에 옮겨 닮고 손으로 찢는데 채 식지 않아 뜨거웠다. 주변을 정리하고 나와 있는 그릇을 씻어 엎고 다시 시도했다. 아까 쫑쫑 썰어 둔 청양고추와 파, 그리고 마늘을 넣고 멸치액젓을 적당히 넣었다. 맛이 안 날 때 만능으로 풍미를 담당하는 한라 참치액을 추가하고 매운 고춧가루에 참기름, 통깨를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완성된 두 가지 반찬을 그릇에 담고 보니 뿌듯했다.

남들은 매일 삼시 세끼 일도 아니게 뚝딱 해치울 반찬 두 가지에 이렇게 흐뭇해할 일인가, 잠시 생각했다. 새댁도 아니고 이제 막 독립한 청년도 아니고 수십 년차 주부인데. 그래도 평소의 나를 생각하면 충분히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어제 끓여 둔 청국장에 시장표 김치를 추가해서 오랜만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손맛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여름 제철 채소가 지닌 맛만으로도 음미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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