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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화 Mar 25. 2020

"집단적 독백"과 "독백적 읽기"

책과 영화, 미디어를 읽는 올바른 방법, 상호작용.

요즘 언어생활의 실태를 꼬집는 용어들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0개 국어”, “아무말 대잔치”, “의식의 흐름”, “집단적 독백” 등입니다. 이는 하나같이 어긋난 의사소통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집단적 독백”에 대해 “읽기”와 관련지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집단적 독백은 자기중심적 언어의 일종으로,
상대방의 질문이나 반응에 관계없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주로 유아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두산 백과사전) 



혼자 말하는 ‘독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의미입니다. 교육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익숙할텐데요. 예를 들어 유아들의 의사소통은 서로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A: “우리 아빠 경찰이다”, 

B: “나 배고파”, 

A: “우리 아빠 멋있지?”, 

B: “나는 치킨 좋아해.”와 같이 자기 중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는 인지 발달에서 드러나는 정상적인 과정이며, 인지적 성숙과 함께 상대방의 감정과 메시지에 반응하고 상호작용적하는 대화 방식에 점차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성숙이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요즘 디지털 문화 속 성인들의 대화에서 ‘집단적 독백’이 자주 목격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 상대방의 메시지를 수용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반응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감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기본적인 관심과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유머로 소비되지만, 이러한 상황이 만연해지면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대화와 소통의 부재는 사회 갈등과 혐오 조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죠. (이미...?)


원인을 따졌을 때, 무관심이라면 “공감 능력 부족”이고, 무시한다면 “자아과잉”이고, 이해가 안 된다면 “이해력 부족”이고, 귀찮다면 “인지적 게으름”이 문제입니다. 복합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죠.



이러한 상황은 읽기에서도 목격됩니다. 현대의 읽기는 로젠블랫의 “독자 반응 이론”과 러멜하트의 "상호작용 모형" 을 바탕으로 독자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텍스트의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독자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 속에서 의미를 재구성한다고 보는 것이죠. 책, 영화, 뉴스 같은 미디어가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독자(청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면 그 메시지를 바탕으로 독자가 반응하여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 앞에서 살펴 본 ‘집단적 독백’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디어가 보내는 텍스트가 무엇이든 간에 독자는 자신의 말만 계속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사상, 신념에 갇혀서 어떤 미디어가, 어떤 텍스트를 보내도 반응하지 않고 ‘독백’을 하는 것이죠. 유형도 세부적으로 나누어보면, 메시지 자체를 무시하는 차단, 메시지를 왜곡해서 수용하는 곡해, 나아가서는 근거 없이 메시지를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비난 등이 있습니다. 


: 차단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경험은 일체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죠. 요즘과 같이 알고리즘 발달로 편향적인 미디어 생활이 더욱 심해진 사회 문화 속에서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취향’, ‘좋아하는 것만 해도 짧은 인생’으로 표현되며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거짓 존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대화와 토론을 차단하고 배척하는 것을 어떻게 ‘존중’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습니까? 

'정치적 올바름'을 논하는 이 시대에, 이러한 태도는 사회 갈등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인 균형 독서, 독서토론, 낯선 사람들을 만나 지속적인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발로 벗어나기 힘드니 시스템의 힘을 빌리는 것이죠. 한두번이 아닌, 지속적인 경험으로 말이죠.


: 곡해는 좀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외면하려고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의 선입견과 경험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상대방의 메시지를 변형시키기 시작합니다. 많은 메시지는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를 두고 있고, 그 여지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죠. 의도적인 것도 있고, 자연스럽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판단중지’의 자세입니다. 철학자 후설이 언급한 용어로, 일체의 선입견에 대해 일단 판단중지한 후, 다루고자 하는 그 사태, 메시지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죠. 살짝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배경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이해'를 위한 작업이지, '조작'을 위한 작업이 아니니까요.


: 비난은 상대방의 메시지 자체를 공격하는 행위입니다. 

흔히 메시지를 말한 메신저를 공격하거나, 어떤 프레임을 씌워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등으로 메시지 자체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여우와 신 포도" 우화에서 처럼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의 가치를 떨어뜨려버리는 거죠. 물론 미디어가 주는 텍스트가 모두 ‘좋은’ 텍스트는 아니기 때문에 독자의 판단에 따라 무시하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거가 필요한 행위입니다. 건강한 비판은 제대로된 수용을 기반으로 하지만, 근거 없는 비난은 수용 이전에 미리 결정됩니다. 이는 바람직한 ‘읽기’의 태도에는 벗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책과 영화 등의 미디어를 접할 이유가 없겠죠. 그냥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요. 


이럴 때는 <100분 토론>, <열린토론>과 같이 사회자와 규칙 속에서 근거를 들어 대화하는 방송을 자주 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쪽만 응원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조금 불쾌하더라도 참고 보세요. TV에 나올 정도면 나름(!) 준비된 패널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타당한 근거'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하는데 좋은 자극이 됩니다. 요즘은 팩트체크 기사나 방송도 자주 하니 꾸준히 검증하는 습관을 들입니다.



제대로 된 상호작용이 아니라 ‘독백’ 속에서 일어나는 ‘읽기’는 그 가치를 잃게 됩니다. 결국 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가벼운 에세이만 찾게 되거나,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책들을 통해 편견만 단단해지는 식으로 향하게 되니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꼰대’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세계시민교육’이 화두가 되고 서로의 인권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이 시대에 ‘인지적 유연성’은 중요한 능력입니다. 말랑말랑한 생각을 유지해야 급변하는 시대에, 다양한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불편한 책’을 찾아 읽으라고 하고, 읽기의 과정에서 도끼나 망치처럼 ‘강렬한 자극’을 받으라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적어도 호기심을 갖고 상대방의 말에, 미디어의 메시지를 그대로 이해해보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 맞는 반응을 생각해야겠죠. 


좋은 책을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도 더 이상 ‘독백’이 아닌 상호작용이 될 것이며 거꾸로 좋은 상호작용에 익숙해진 분들은 바람직한 ‘읽기’로 유연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극단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서 '읽기'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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