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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화 Mar 26. 2020

믿고 싶은 것을 믿는 "편향성"의 시대

진실이 뭐 중요하나... 탈 진실의 시대.

TV에서 <편애중계> 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소개팅을 하는데 각 패널의 입장에서 중계해주는 것이다. 프로그램 소개도 거창하다.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작은 도전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들을 위해
편애중계진이 현장으로 달려간다! 이유를 불문하고 오롯이 내 선수만을 편애하고 응원하며 그들의 도전을 중계하는 프로그램”




 객관적이고 공정한 중계는 포기하고, 오직 내 선수만을 응원하는 중계인 것이다. 이는 국가대표 스포츠 경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선수들을 위하는 마음을 한가득 담아 중계하고, 그 기쁨과 아쉬움을 담아 국민들에게 전달한다. 좋아서 껴안고, 슬퍼서 울기도 한다. 그러한 중계를 소개팅에서 하다니, 신선했다.(포맷은 매번 조금씩 다름) 


방송에서 ‘직캠’도 같은 맥락이다. 카메라맨이 전체적인 무대와 음악에 맞게 균형있는 촬영을 하는 것은 의미 없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만 집중적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이것도 스포츠로 따지면 "손흥민 활약상" 이런 영상이다. 90분간 22명의 선수들이 아무리 뛰어다녀도 내 눈에는 '손흥민'만 보인다, 이런 느낌으로 그의 움직임이 중심인 영상이다. 이런 흐름에 맞게 여러 명이서 하는 토크쇼의 경우, 특정 인물 중심의 재편집 영상이 “OOO 시점” 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앞뒤 맥락보다, 내가 편애하는 그 사람에 집중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 교육에서는 가짜뉴스보다 더 근본적인 ‘편향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가짜뉴스를 만든 목적이 ‘편향적인 의도’에 있는 경우도 많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더라도 ‘편향성’이 가득한 기사와 정보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기사’의 덕목에 있는 ‘공정성’’이란 미덕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뚜렷한 편향이 연예계를 넘어 다양한 미디어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고 있다.


조회수와 좋아요, 구독자 수와 같은 ‘인기도’가 중요한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에서는 정의로운 가치보다는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의 만족도가 중요하다. 즉 ‘사이다’와 같은 발언으로 지지층의 사랑에 보답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는다. 이는 다양한 수익 구조로 연결되어 자본주의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 


광고계에 ‘아이돌’이 블루칩이 된 것은 팬덤의 구매력 덕분이다. ‘덕후’가 존중받는 이 시대에 그러한 덕질은 하나의 취미로 인정되고, 마케팅은 역으로 그것을 이용한다. 해당 연예인이 광고로 하는 제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이 나기 때문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호구’이지만 내부의 시선으로는 ‘사랑’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월등히 넘어서는 감성적인 판단이다. 아이돌 외에도 '팬덤 마케팅'은 가장 핫한 전략으로 손꼽히고 있다. 



영화 <마더>에서 보여주는 맹목적인 엄마의 사랑이 팬덤 문화에 근간이 되고 있다. 대상이 잘못을 저질러 ‘탈덕’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라도 지켜주자’, ‘그럴리 없다’, ‘끝까지 믿는다’며 더욱 연대를 강화하는 사람도 있다. 다양한 추천 알고리즘은 우리의 편향성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과거 ‘썰전’과 같이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토론하는 방송은 이제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둘 중 하나는 ‘그냥’ 싫을테고, 그것을 참아가며 볼 사람은 많지 않다. 시장 중심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인기가 없으니 제작자에게 외면 받을 것이고, 어차피 두 가지 시점으로 나누어 편집된다면 기획  자체가 의미 없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라는 책에서 다루는 Factfulness는 '사실 충실성'으로 번역된다. 사실에 근거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습관이다. 지금은 조금만 검색해도 여러가지 통계와 연구 결과를 다룬 논문을 찾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나의 생각을 점검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지금과 같은 가짜 뉴스의 시대에 중요한 자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이 든다. 


이러한 방법을 몰라서 하지 않는가?


이어서 생각해볼 것이, 유발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는 "탈진실의 시대"라는 말이 나온다. 기준을 엎어버렸다. 뭐 사실(진실)이 그리 중요해지지 않은 시대.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만연한 시대이다. 이는 편향된 생각, "인지 편향"을 뿌리로 하고 있다. 최근 정치적인 다양한 갈등이 이를 근거로 한다.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탈진실의 시대", "편향의 시대"에,
균형과 조화를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건강뿐이다. 정신적 건강. 이렇게 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편향된 인지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순간은 정신적으로 건강해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 속에 갈등에 대한 우리의 조절능력은 점점 약해지고 면역력은 날로 취약해질 것이다. 우리의 안정을 해치는 것에는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내고, 화를 내고, 외면할 것이다. 갈등을 조절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나의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믿음이 깨진다면 어떨까? 갈등 조절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인지 부조화 상황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현실을 왜곡하여 믿던 것을 그냥 믿거나, 상대방을 비난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멘붕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갈등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토론이다. 토론은 의도적으로 각을 세우고, 규칙 속에서 갈등 상황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상황을 합리적으로 조율하는 방법을 배운다. 물론 불편하지만, 이 불편 속에 갈등조절능력이 형성된다. 그리고 갈등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고 극복하는 힘이 자란다. 편향성의 시대에 가장 부족하면서도, 필요한 능력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토론을 두려워하지 말자. 진실이란 목표를 위해 달려가기보다 그 과정을 즐기자. 그리고 계속 하자.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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