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를 대하는 필수 자세!
미디어 읽기를 하자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부터 느낍니다.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무엇을 읽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답은 없습니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란 책에 재미있는 실험이 소개되었습니다. 버튼 몇 개가 있는 방에 참가자들을 한 명씩 넣어두고, 특정 행동을 하면 점수를 얻었음을 알리는 불이 들어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점수를 받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내라고 했고, 그 다음 30분 동안 점수를 얼마나 올릴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점수가 올라가는지 관찰하며 다양한 패턴을 찾아냈습니다. 특정 순서로 버튼 누르기, 오래 누르기, 다양한 자세로 누르기 등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점수는 사실 무작위로 주어지도록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상상으로 규칙을 만들어낸 것 이죠.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누군가는 “인간은 역시 제멋대로야”, “거짓말쟁이야” 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미화’ 작업이 인간의 매력이고 능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서 이렇게 ‘상상의 질서’를 만들고 의미의 그물망을 팽팽하게 하는 작업이 인간을 지금의 위치에 올려 놓았 다고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 주관적 의미화를 가치 있게 보고자 합니다.
미디어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작위로 돋아난 이파리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미의 기준을 물어도 사람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릅니다. 보편적인 미의 기준을 들먹거려도, 그 또한 그 시대의 기준일 뿐이고 다른 시대로 넘어가면 또 달라집니다. 대상이 아닌,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의 문제입니다. 결국 내 눈에 예뻐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작품을 놓고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작품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라고 생각하니?”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어느 정도 한정된 범위 안에서 답이 나올 것입니다. 반면에 “넌 작품에서 무엇을 보았니?”라고 물으면 대답이 천차만별로 갈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을’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 것,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 작품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나의 문제입니다.
의외로 개인의 감상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작가의 주장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 꽂힐 수도 있습니다. 바로 ‘꽂힌다’는 사실. 그래서 무엇을 보았느냐를 통해서는 작품보다 작품을 읽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타박하기 전에, 그 이유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죠.
드라마 <미생>을 보고 젊은이들은 장그래나 안영이에 이입하고,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한 직장인들은 오 과장에 이입합니다. 재난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운명보다 중간에 잠깐 나온 강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돼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품의 핵심도 중요하지만 공감은 내가 하는 것이고 의미는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저절로 쥐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렇게 인생도 주어진 것에 휘둘리지 않고,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체적으로.
비판적 사고 기르기
스스로 점검하기
주체적 태도를 오해하면,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의 생각만을 맹신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에 친근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면 ‘비판적 사고’는 조금은 거리를 두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에 대한 미국철학협회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석, 분석, 평가, 추론을 산출하는 의도적이고 자기 규제적인 판단인 동시에 그 판단에 대한 근거가 제대로 돼 있는지, 또한 개념적, 방법론적 또는 맥락적 측면들을 제대로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산출하는 의도적이고 자기 규제적인 판단”
‘비판’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손가락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지만 저는 거울이 먼저 떠오릅니다. 비판적 사고의 기본은 스스로를 점검하는 자기 규제적인 사고 활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점검하고 판단하는 사고 행위인 것이죠.
정보전달을 위한 콘텐츠에서는 내용이 사실인지, 의견인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지,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수시로 점검합니다.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에서도 인물의 행동이 적절한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인지,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 개연성이 부족하지 않은지 등을 생각해봅니다. 이 점검의 대상은 해당 텍스트 외에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 나에게도 적용됩니다. 나는 왜 이 부분에 꽂혔는지, 이 부분은 왜 불편했는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죠. 진정한 주체적 읽기는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독선적인 태도가 아닌, 열린 태도입니다. 이러한 ‘인지적 유연성’은 건강한 소통에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관과 객관 분리하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딱딱해보일 수 있으니 예를 들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과거 KBS <1vs100>이란 퀴즈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연예인과 같은 1명과 일반인 100명이 함께 퀴즈를 맞히는 구성이었는데, 온라인 예심을 보고 100명 중 1명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1/100이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죠. 병풍처럼 깔린 100명은 잘 보이지 않고, 저는 57번으로 가운데쯤 어중간하게 있었습니다. 그래도 TV에 나왔을 때, 엄마를 비롯한 지인들은 100명 중에 1명을 알아보았습니다. 문제를 많이 맞혀 개인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고, 하얀 셔츠를 입어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잘 찾아내어 사진도 찍어두곤 했습니다. 여기서 ‘주관성’이 발휘되는 것이죠. 연예인을 비롯한 101명 중 지인으로 ‘인상 깊은 인물’이 되어 의미 있게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도 졸업사진이나 소풍사진 중에서 놀랍도록 신기하게 아는 사람을 찾아내곤 하죠. 그것은 객관적으로 멋있어서, 눈에 띄어서가 아니라 주관적 인식의 결과물입니다. 나한테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 후에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라는 프로그램에 시청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과 유아인 배우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100년을 재조명하며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거기서도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앉아 있었는데, 우연히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유아인 배우의 질문에 대답하며 TV 화면에 함께 잡히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누가봐도 인식하기 좋은 상황이었지만, 엄마를 비롯한 지인들의 또다른 주관성이 발동했습니다. “유아인 배우보다 낫다, 밀리지 않는다” 뭐 이런 식인거죠. 실제로 눈앞에서 본 저는 객관적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아인 배우는 저보다 얼굴도 작고, 팔다리도 길고 황금 비율에 배우 포스가 물씬 풍기는 진정 연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관성에 매몰된 지인들은 객관성을 외면하며 보고 싶은 것에 집중했습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인정 받을 수 없는 신념을 계속 유지하는 것, 심지어 강요하는 것은 큰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조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주관과 객관의 균형을 맞춘다면 이정도가 되겠죠. 유아인 배우 정말 멋있는거 알겠는데(객관), 내눈에는 승화도 멋있게 보이네(주관).
텍스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과, 텍스트가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분리하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문제로 따지면 출제자의 의도, 대화로 따지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같은 것이죠. 전에 평생학습센터에서 <흥부전>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주부의 감상평은 “흥부 부인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신선하고 흥미로운 감상이었죠. 실제 가정 생활을 하면서 착하지만 무능력한 가장으로서의 흥부 모습이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삶이 녹아든 감상은 참 인상적이었고, 자신있게 이야기해준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감상을 존중하면서, 작품의 메시지가 주는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메시지 “권선징악”도 함께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의도적으로 분리하는 것이죠. 통합은 나중에 천천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개성을 살리면서, 또 거기에 갇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연한 생각과 함께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원활해집니다. 무엇이든 과유불급입니다. 한 쪽에 우위를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의 균형 속에서 조화롭게 생각하는 것이죠.
출처: <미디어 읽고 쓰기> 이승화 / 시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