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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화 Apr 24. 2020

진실을 넘어, 편향성의 시대

가짜뉴스 그 넘어...


앞에 가짜뉴스를 이야기하며 ‘편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다루었습니다. 진짜와 가짜 사이의 회색지대 속 편향성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죠. 또 최근 미디어에 적용되는 추천 알고리즘이 수용자를 편협하게 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100% 객관적, 중립적 시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편향성은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죠. 그래서 우리는 뉴스를 비롯한 미디어에 중립성과 객관성 등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향성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극복의 대상이 아닌 것이죠.     



 쉽게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이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하면 우리나라 중계진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일본 선수가 실수를 하면 기뻐하고, 한국 선수가 골을 넣으면 부등켜 안고 춤을 춥니다. 과감한 리액션이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도 하죠. 편파적이라고 흉보지 않습니다. 반대로 일본 선수가 골을 넣으면 침울한 표정으로 아쉬움을 달랩니다. ‘한국 2 : 1 일본’ 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때, 우리 신문은 ‘드라마 같은 승리’, ‘극적인 결승골’ 등의 표현으로 승리를 자축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편은 어떨까요? ‘아쉬운 패배’, ‘억울한 패배’ 등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보는 시각이 명백히 다른 것이죠. 내가 하면 전략이고 남이 하면 노매너입니다.


 해외 경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라운드 위에 있는 22명 중에 한국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에 집중하여 중계를 진행합니다. 실제로 한국 선수와 친한 외국인 선수에게 친근감을 느끼기도 하죠. 개인 편집을 바탕으로 한 영상은 더욱 애정이 가득합니다. 한 선수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활약상만 모아두고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응원합니다.


 연예계 방송으로 하면 ‘직캠’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맨이 전체적인 무대와 음악에 맞게 균형있는 촬영을 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만 집중적으로 보고 싶은 것이죠. 현재는 한 그룹이 공연을 하면, ‘센터’라는 개념을 앞세워 균형 잡힌 구도를 배치하고, 순간순간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가수가 주목받을 수 있도록 동선을 바꾸어 카메라로 촬영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한 사람만 직접 촬영하는 직캠은 팬들에게 선택과 집중의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맞게 여러 명이서 하는 토크쇼의 경우, 특정 인물 중심의 재편집 영상이 “OOO 시점” 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말하는 사람 위주의 카메라 구도가 아니라, 특정 인물의 리액션부터 하나하나 다 담는 것이죠. 주변 사람들과 이루는 앞뒤 맥락보다, 내가 편애하는 그 사람에 집중하고 싶은 것입니다. 수용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편협하다고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습니다. 



 광고계에 ‘아이돌’이 블루칩이 된 것은 팬덤의 구매력 덕분입니다. ‘덕후’가 존중받는 이 시대에 그러한 덕질은 하나의 취미로 인정되고, 마케팅은 역으로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해당 연예인이 광고로 하는 제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이 나기 때문이죠.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합리적인 소비에서 벗어난 행동이지만 내부의 시선으로는 ‘사랑’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월등히 넘어서는 감성적인 판단인 것이죠. 아이돌 외에도 '팬덤 마케팅'은 가장 핫한 전략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제작할 수 있는 현대 미디어 생태계도 이러한 전략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조회수와 좋아요, 구독자 수와 같은 ‘인기도’가 중요한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에서는 공정성과 중립성을 기반으로 한 정의로운 가치보다는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의 만족도가 중요합니다. 즉 ‘사이다’와 같은 시원한 발언으로 지지층의 사랑에 보답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죠. 수익성을 목적에 둔 행동일 수도 있고, 수익성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주목받는 대상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실망하고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리 없다’, ‘끝까지 믿는다’, ‘우리라도 지켜주자’며 더욱 연대를 강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정적인 반응이 우선시되죠. 다양한 추천 알고리즘은 이러한 우리의 편향성을 더욱 견고하게 해줍니다. 나의 ‘시청시간’과 ‘구독’, ‘좋아요’에 발맞추어 비슷한 성향의 영상을 계속 추천해줄테니까요. 간혹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패널로 나와 대화하고 토론하는 방송들이 있는데, 어느 쪽을 지지하든 반대와 견제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 말은 시청하는 사람 중 중립 성향이 아닌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또는 참지 않고 개인방송 플랫폼으로 갑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쪽의 입장과 저쪽의 입장, 서로 다른 입장의 채널을 균형 있게 만나보라는 이야기는 스트레스를 키우라는 이야기만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튜브에서는 기존 방송국에서 송출된 미디어를 다양하게 편집한 콘텐츠를 만날 수 있습니다. A와 B가 토론하는 내용에서 A의 시점만 분리하고, B의 시점만 분리한 편집본도 존재합니다. A의 지지자와 B의 지지자는 만족할 수 있겠죠. 직캠처럼 내가 애정하는 인물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어떻게 될까요? 일부러 다른 성향의 사람들로 패널을 구성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시장 중심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인기가 없으니 제작자에게 외면 받을 것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기울어진 채로 즐기는 것이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은 기울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요.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알기 전까지,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기레기(기자+쓰레기) 저널리즘과 가짜뉴스를 퇴치하겠다는 기획 의도로 KBS에서 제작된  <저널리즘 토크쇼 J>라는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공영방송에서 제작하는 비평 프로그램인 만큼 기대감도 높았습니다. 기존 언론의 보도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으로 비판을 하였지만, 비판의 대상이 특정 성향 언론에 집중되어 있고 패널 구성이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해명을 하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애매하죠. 결국 특정 성향의 사람들은 떠나가고 맙니다. 그럼 다양한 언론에 대해 정해진 비율로 비판을 하는 것이 공정할까요? 패널 구성도 마찬가지로, 진보 성향 2명, 보수 성향 2명 이렇게 맞추어야 할까요? 그럼 누군가는 ‘기계적 중립’ 이라며 또 비판할 것입니다. 상대 진영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채널을 돌릴 수도 있겠죠. 이만큼 ‘편향성’이란 것은 매우 상대적이고 어려운 개념입니다. 본인들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편향적인 것이 꼭 나쁜 것일까요?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라는 책에서 다루는 Factfulness는 '사실 충실성'으로 번역됩니다. 사실에 근거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습관을 말하죠. 지금은 조금만 검색해도 여러가지 통계와 연구 결과를 다룬 논문을 찾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나의 생각을 점검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지금과 같은 가짜 뉴스의 시대에 중요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이러한 방법을 몰라서 하지 않을까요? 이어서 생각해볼 것이, 유발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는 "탈진실의 시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진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대.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만연한 요즘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편향된 생각, "인지 편향"을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정치적인 다양한 갈등이 이를 근거로 하죠. 믿고 싶은 것을 충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어떠한 근거도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죠.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 해석의 여지도 있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런 "탈진실의 시대", "편향의 시대"에, 균형과 조화를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건강뿐입니다. 정신적 건강. 이렇게 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편향된 인지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순간은 정신적으로 건강해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 속에 갈등에 대한 우리의 조절능력은 점점 약해지고 면역력은 날로 취약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안정을 해치는 것에는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내고, 화를 내고, 외면할 것이며, 갈등을 조절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나의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믿음이 깨진다면 어떨까요? 이렇게 기존의 신념과 실제로 직시한 현상에 대한 불일치나 비일관성을 목격한 상황을 ‘인지 부조화’라고 합니다. 갈등 조절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현실을 왜곡하여 믿던 것을 그냥 믿거나, 상대방을 비난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건강한 면역력을 갖추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갈등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토론입니다. 토론은 다양한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그 상황을 합리적으로 조율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물론 불편한 의견, 사람, 상황을 만날 수도 있지만, 이 불편함 속에 갈등조절능력과 인지적 유연성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갈등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고 극복하는 힘이 자라는 것이죠. 알약 한두개 먹는다고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지속적인 경험이 쌓여야 합니다. 편향성의 시대에 가장 부족하면서도, 필요한 능력을 배우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토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미디어 읽고 쓰기> 이승화 /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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