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한 마음으로, 즐겁게...
즐겁고 생산적인 미디어 토론을 위해서는 참가자의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와서 토론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논쟁을 하다가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면 그 모임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욱 의미 있는 토론모임을 위해 필요한 태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흥미를 생각합니다
지정 작품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경우, 그 작품에 대한 흥미가 빠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흥미를 줄 수는 없는 만큼 작품의 매력에만 집착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 작품에 흥미가 없었어도 토론 시간은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토론을 통해 작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없었던 흥미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작품이 재미없어서 모임 안 나갈래요.” 이런 말은 잠시 접어두길 바랍니다. 모임에서 뒷담화의 매력을 빼놓을 수 없듯이, 작품 흉보는 재미도 쏠쏠하니까! 그러한 과정 속에서 본인의 취향과 가치관을 깨닫기도 합니다.
책 《곰돌이 푸의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로 모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로 큰 화제가 되었던 책이었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작품성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토론 주제 중 하나를 ‘왜 이렇게 많이 팔렸을까?’로 선정하기도 했죠. 많은 분들이 책 자체에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위로가 필요한 현 사회의 모습, 사람들의 정서적 결핍 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공감하였습니다. 그러자 작품의 시대적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와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주제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작품에는 선명한 주제가 있을 수 있지만, 꼭 그 주제가 모임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주제와 이야깃거리를 사람들에게 열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한 대화와 설득의 과정은 환영이지만, 내가 느낀 주제를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다양한 시각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니까요.
박범신 작가의 《은교》라는 책과 그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함께 보고 모임을 했는데, 발제자로서 처음에 염두에 둔 주제는 ‘늙음과 욕망’이었습니다.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그 육체적 쇠락 속에서 갖는 정신적인 열망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모임이 열리자 누군가는 등장인물의 예술에 대한 갈망에 꽂혔고, 누군가는 미성년자에 대한 두 남자의 욕망에 불쾌해했습니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주제가 작품의 핵심인지는 살짝 미루어 두어도 됩니다. 세 가지 이상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더 흥미롭고 유익한 시간이니까요.
자신의 이해관계와 얽힌 욕심을 버립니다
다양한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힌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입장에 처해있다거나, 어떠한 입장을 지지한다거나. 이럴 때 감정적으로 깊이 반응하다보면 건설적인 토론이 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찬반토론 대회에서는 찬성/반대를 토론 전에 무작위로 정하고, 토론 수업에서도 자신의 실제 의견과 반대 입장을 지정하기도 합니다. 이야기 나누는 순간만큼은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열린 자세로 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치, 종교, 경제와 같은 주제는 토론이 격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란 책으로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 작가의 성향이 뚜렷한 만큼 참가자의 반응도 뚜렷하게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책에 나온 다양한 이론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니 현재 몸담은 입장에서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토론은 무조건적인 방어와 공격이 아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로 진전될 수 있었습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경청합니다
토론이란 것은 말하기와 듣기가 반복되는 행위입니다. 다들 ‘경청’이란 말이 익숙하긴 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말이 상대방의 말을 끊고 끼어들거나, 대화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상대방이 말하고 나서 5초 뒤에 말을 하자는 생각으로 임하면 좋습니다. 5초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곱씹는 시간이지만, 속으로 세다 보면 3초도 못 갑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소중합니다.
학생들 토론 수업을 하면, 말을 끊지 말라고는 했으니 중간에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준비~ 땅’ 하듯이 상대방이 말을 끝내자 마자 바로 대답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대부분 그 말은 앞에서 한 말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아니면 중간부터 이미 내 머릿속에는 내가 말할 내용이 가득했을 테니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릴 리가 없습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할지, 내가 준비한 내용을 쏟아내고 싶을 뿐입니다. 핵심은 마지막에 있을 수 있으니, 끝까지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기꺼이 설득당합니다
가끔씩 설득당하는 것을 굴욕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처음 A라고 말했다고 끝까지 A라는 논조를 유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충분히 중간에 생각이 바뀔 수 있고, 새로운 매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관성에 대한 압박 때문인지, 입장이 엇갈리면 다양한 근거를 내세우며 설득을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A라는 생각을 가지고 왔다가 B가 되긴 힘들어도 AB정도의 생각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게 욕심이라면 B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고 갔으면 합니다.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생각의 유연성을 기른다는 점에서는 설득당할 줄 아는 것이 더 긍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토론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귀를 닫고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토론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죠. 이런 상황에서의 ‘이기기 위한’ 토론은 서로 말꼬리잡기, 약점잡기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직한 토론에서는 설득의 여지를 남겨두고 유연하게 상대방의 입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차곡차곡 정리합니다
녹음을 하지 않는 이상, 말로 주고받은 것은 쉽게 날아갑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외국에서 하는 토론 수업 때 토론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토론 이후에 적는 에세이입니다.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다시금 정리해보는 것이죠. 체계적으로 하려면 토론 전 · 중 · 후를 나누면 좋습니다. 토론 전,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나의 생각과 토론 중간에 주고받은 이야기, 토론 후에 주고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 입장을 나누어서 정리하는 것이죠. 내 생각의 변화 양상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로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 간단히 사진이라도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먹기 전에 인증샷 찍듯이, 사람들과 사진이라도 찍는 것이죠. 나중에 그 사진만 보아도 그 당시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이야기, 그 분위기가 새록새록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 자료들이 하나하나 쌓여 내공이 형성됩니다.
토론 모임에 사회자가 있다면 사회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이상적인 사회자로 손석희와 유재석을 꼽는데, 미디어 토론은 텍스트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므로 사회자에게 요구되는 부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손석희식 진행의 매력은 ‘날카로움’입니다. 중간 중간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과 깔끔한 끊기. 혹자는 시간을 잘 맞추고 참가자들에게 발언 시간 분배를 잘 하는 것, 즉 참가자들이 규칙을 준수하도록 이끄는 것을 사회자의 미덕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 기준에 가장 잘 맞습니다. 찬반토론과 같이 의견이 격하게 엇갈리는 주제에 적합합니다. 특히 참가자들이 고집을 부리거나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빛을 발하죠. 사회자가 일정한 권위와 카리스마가 있어야 참가자의 말이 계속 이어질 때 적당히 끊을 수 있고, 논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조금은 기분 나쁠지 모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토론의 성격에 따라 사회자의 역할도, 참가자에게 필요한 태도도 달라집니다. 이런 진행 방식은 참가자의 경험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죠. 이야기에 이입하여 나의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데, 시간이 초과되었다고 누가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면 당사자는 기분도 상하고 맥도 빠질 것입니다. 이때는 ‘굿 리스너’가 필요합니다. 국민MC 유재석처럼 공감하며 잘 들어주고, 날카로운 지적보다는 이야기를 더 꺼낼 수 있는 질문을 하며 적극적인 듣기를 해줘야 합니다. 참가자들도 마찬가지, 한두 사람만 이야기하게 놔두기 보다는 서로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며 다독거려줘야 합니다.
지식을 교류하는 자리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하고, 서로의 해석을 공유하며 각자가 알고 있는 확장된 정보를 나누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논점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내용의 이해를 위한 질문과 설명이 오고가는 것이 이야기 진행에 더 도움이 됩니다. 사회자가 발제자 역할을 하며 사전 자료 준비를 하면 좋습니다. 참가자들 서로가 알려주고 싶은 내용들을 가져오면 자리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단순한 강의와는 다른 토론의 특징이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미디어 읽기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부담없이 임하라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항상 작품의 권위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읽기는 제작자와 수용자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과정이고, 토론은 그 과정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또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단순하게 재미있었는지 재미없었는지부터,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었는지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 참여 도중에 생각이 쑥쑥 성장하기도 합니다.
출처: <미디어 읽고 쓰기> 이승화 / 시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