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판사님, 팬클럽 가입하겠습니다.
*한마디: 판사도 사람이다. 느낌도 있다.
*추천대상: 사회정의에 대한 고민 있으신 분.
*깔때기: 내가 판사라면?
우선.. 좋은 책을 만나게 해 준 북스타그램에 감사합니다. 스치듯이 피드에서 몇 번 보다가 한번 집어들었는데 이게 웬걸! 법륜 스님 이후로 정말 좋은 분을 만난 느낌은 오랜만이다. 이렇게 싹트는 것이 팬심이란 건가! 이런 분한테 재판 한번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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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을 실제로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 (다행인건가....) 그래도 항상 호기심은 있었다. 지극한 상대주의자에 회의주의자인 나에게 '판결'이란 것은 굉장히 복잡미묘하고 난해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불쌍했다. 그러한 생각이 극대화된 것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주인공 아빠. 그 책임감의 무게에 등이 굽은 곱추같은 이미지, 그래서 '판사'란 존재는 나에게 아틀라스처럼 하늘을 짊어지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변호인을 비롯한 여러 법정 영화와 책을 봤지만 그래도 내 이미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짜'라고 생각했기에. (뭐가 진짜인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이번에 바뀌었다. '판사'에 대한 이미지가. 판사도 사람이고,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모습을 이 책에서 솔직하게 나타내 주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할까. 이 책에도 나오는 '공감'이란 부분이 날 건드렸다. 이론적으로 법이 어쩌구 저쩌구, 법은 수시로 개정되고 어쩌구 저쩌구, 다른 나라의 법은 어쩌구 저쩌구... 이런 논리적인 궁시렁거림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저울질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그것을 뚫고 나오는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정말 좋았다. 거기다 유쾌한 글맛까지. 정말 '에세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주구장창 아름답고 시적인 묘사로 감성을 건들고 공감해달라고 발버둥치는 요즘 에세이보다 그냥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 진짜 에세이가 아닐까라는 건방진 생각도 해보게 했다. 팬심이니까 이해해주시길. 바로 판사님의 다음 책, <개인주의자> 갑니다.
-------------------------------------------------------------------------------------- 인용부분
- 이 책의 제목인 ‘판사유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판사로서 재판을 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다. 판사에게도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의미는 이 사회의 많은 분들이 판사에 대하여 느끼는 아쉬움과 불만을 잘 알기에 이를 고민하고 반성한다는 뜻. 즉 판사에 대한 유감의 의미다.
그래도 글이란 무겁지 않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지라 독자들이 책을 읽은 후에‘이 판사 느낌 있네?’라는 의미의 ‘판사유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넉살 좋은 욕심을 품고 있다. - 작가의 말-
- 세상에 신경 끄고 쿨한 개인주의자로 내 인생이나 행복하게 살든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바꾸기 위해 성실하게 헌신하여 살든지, 뭐 둘 중 하나로 정리되는 성격이면 편하겠는데 이건 본질은 전자인 주제에 후자를 감기처럼 가끔 주기적으로 앓고 사니 남는 건 자기모멸일 때가 많다.‘
- 그러다 판사가 되어 일을 하면서 뒤늦게 깨달은 것들이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한다 해도 오판으로 남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살겠다는 자신감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 책에서 본 추상적인 인간과 실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 한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에 감히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어느 하나 없는데도, 맡은 소명은 주어진 증거의 테두리 내에서 판단하여 입증이 되었다고 판단하면 피하여 가지 말고 명확히 정의를 선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두렵습니다. 오판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죄는 무간지옥에서 영원히 속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늘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법정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삶에서 다양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바로 지금,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주는 것이 직업 교육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 사회는 소수만이 승자가 될 수 있는 경쟁이 아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행복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먼 훗날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자가 되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며 행복하겠다는 희망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선 바로 이 자리에서 소박하나마 가족, 이웃과 함께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 누구에게도 폄하되지 않고 존중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저 역시 분명하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입으로 싫다고 말하면 싫은 겁니다. 인간 사회에 살고 싶으면 본능을 억제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 정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범인의 변명이 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형사법적으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떠올리게 하지만 보다 철학적으로는 과연 인간은 객관적 진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과 혼동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바라는 것에 저촉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법정에 세웠던 바로 그 반지성 아닐까요.
-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하는 거야.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이거든. 우리나라의 미래인 너희들이 정답만 잘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하여 꼭 필요한 질문을 하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 워낙 자기주장이 강한 서구 문화와 달리 겸양이 미덕인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결론을 처음부터 강하게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가 조금이라도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 또 설령 자기 결론이 틀렸다고 비판받더라도 그건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 봐서 수긍이 가면 바로 쿨하게 시인하고 결론을 바로 수정하면 되지요.
- 저는 소신 강한 사람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얼마나 오류에 빠지기 쉬운지를 생각한다면 언제나 자신의 결론이 잠정적인 것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주저 없이 결론을 수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 사람들은 ‘논리’나 ‘당위’로 절대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해야 비로소 변화하지요. (...) 대다수의 인간은 옳은 비판이라도 비판을 받으면 우선 방어 본능이 발동하여 반발하거나 변명하게 되죠.
- 오늘날 심각한 사법 불신을 낳은 이유 중 상당수가 이런 문제에 대한 오해인데, 언론이나 대중들이 법에 무지하여 오해한다고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법원이 오해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