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일의 휴가
처음 한국에서 Zoom으로 인터뷰를 하고 이곳의 일자리를 얻게 된 후, 비자를 위해 연구소에서 보내주는 공식적인 서류가 필요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서류를 받아야 할 때가 바로 이 나라에서 사람들이 휴가를 가장 많이 가는 흔히 말하는 바캉스 시즌이었다. 서류가 너무 도착하지 않아 나와 연락하던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시차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는데, 메일을 열고 보니 자동메일로 자기는 휴가로 자리를 비웠으니 급한 일이면 자기 동료 A에게 연락하라는 거였다. 맘이 급했고 내 나름 급한 일이라 생각되어 A에게 메일을 보냈다.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기분이 싸했다. 역시나 자동메일로 자기는 휴가 중이니 급한 용무면 자기 동료 B에게 연락하라는 거였다. B가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자세히 보니, 나와 연락하던 담당자였다. A는 B에게 B는 A에게, 서로 급한 용무면 연락하라고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다. 둘 다 휴가를 갔으면서 말이다. 이 나라로 오기 전부터 이 나라의 일처리에 화딱지가 났었다. 무슨 휴가를 3주씩이나 가냐고 투덜거렸었다.
나에겐 일 년에 44일의 휴가가 있다. 처음에 이 얘길 듣고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휴가가 이렇게 많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박사 후 연구원처럼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들 담당자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그녀가 중요한 걸 알려줘야 한다면서 찾아왔다. 중요한 일이라니 괜히 긴장됐다. 잠시 후, 나의 긴장감이 아깝게도 그녀가 설명해주는 건 휴가일을 등록하는 사이트였다. 이게 그렇게 찾아와서 설명해 줄 정도의 중요한 일인가 싶었는데, 이 나라에서 휴가란 상당히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예전에 영화를 한 편 봤었다. 코미디 영화로, 극 중에서 경찰들이 실수로 경찰 서장에게 곰을 잠재울 마취총을 쏴버렸다. 처음에는 다들 전혀 동요하지 않다가 누군가가 서장이 안 깨어나면 우리 휴가는 누가 승인해주냐는 말 한마디에 다들 난리가 나서 잠든 서장을 깨우는 내용이 나왔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휴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는 휴가를 정말 3주, 한 달씩 떠난다. 휴가를 언제, 어떤 이유로 쓰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업무가 간섭 없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휴가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제제도 없다. 형식적으로 휴가 신청을 하면 보스의 승인이 나야 하지만 그냥 절차일 뿐이다. 아무 질문 없이 언제나 휴가는 승인 난다. 어차피 승인해야 하는 거 보스는 매번 승인해주기 귀찮을 것 같다.
연구 총책임자가 한 달 동안 휴가를 떠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다. 이렇게 자리를 비우는데 연구가 계속되고 실적이 나온다는 게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연구 책임자인 우리 보스의 경우, 휴가 중이지만 계속해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동 메일로 "내 동료 A에게 연락하세요"같은 설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휴가지만 다른 사람들의 휴가와는 조금 다르구나 싶었다. 그러니 연구들이 계속 진행될 수 있구나 싶었다. 책임자의 삶이란 쉽지 않구나라고도 느꼈다.
남은 12월에도 이미 2주간의 휴가를 등록해놨음에도 올해 휴가일이 15일이나 남았다.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44일은 너무 많다. 이렇게 쉬어도 되나 싶고 맘이 불편한 게 난 아직 한국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