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나 싶게 발표 마치기
우리 연구실에는 제일 위에 교수가 한 명, 그 아래 교수 한 명 더, 그다음 연구소 소속의 교수급 정규직 연구원 한 명, 그다음 연구직 직원 둘, 초임 교수 하나, 테크니션 둘 그 외 박사과정 10명, 포닥 4, 그 외 인턴들로 이루어져 있다. 빅그룹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그룹도 아닌 어느 정도 규모는 있는 그룹인 거다.
한국에서는 박사과정/석사학생만 합쳐서 최대 12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교수 한 사람의 지도하에 있었다. 다른 연구실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전 연구실은 2주에 한 번씩 그룹미팅을 하고 그때마다 모든 학생들이 2주간의 자기 실험 진행 상황에 대한 발표를 했었다. 토요일에 있는 그룹미팅을 위해 매일 금요일 밤에는 모두가 밤늦게 퇴근도 안한채 발표 자료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발표를 하다 보니, 교수님이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느껴졌고, 그때그때 관심 있는 연구들에만 조금 집중해서 봐주는 느낌이 들어 소외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종종 있었다. 게다가 2주마다 발표를 하다 보니, 발표의 퀄리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결과 보고에 지나지 않아 제대로 된 연구에 대한 토의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프랑스의 이 연구실에 온 후 그룹미팅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매주 목요일 아침 9시 반부터 진행되며 하루에 두 명씩 발표를 한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하다 보니, 다음 자기 순서는 최소 3개월 후에나 있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실험을 하며 데이터를 쌓아가고 연구를 진행한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상당히 열의에 차있고, 연구에 동기부여가 많이 되어 있었다. 그룹미팅마다 발표하는 학생 한 명 한 명 발표의 질이 좋았다. 데이터의 나열이라기보다, 자기 연구에 대한 이해가 확고한 게 보였다. 잦은 발표가 아니라, 최소 3개월에 한 번 있다 보니 모두 자기의 발표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제법 많은 시간을 소요하여 철저히 준비하는 편이었다. 그룹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도 최선을 다하는가 하면, 발표를 듣는 다른 학생, 포닥, 정규직 연구원들 모두 집중해서 듣고 다양한 질문들을 한다. 가끔은 발표 후 질의응답으로 1시간이 소요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두 명이 발표를 하고, 질의응답을 하다 보니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경우가 있었고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하더라. 그룹미팅이 너무 오래 진행되어 당일 아침에 다른 업무나 실험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이곳 사람들은 요구하는 게 참 많다.) 그래서 매주 두 명 발표에서 한 명 발표로 변경되었다. 게다가 한동안 안 하던 Literature 발표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자기 research만 발표했었는데, 사람들이 순서대로 Literature, research를 번갈아 가며 발표하다 보니 한 번 발표하면 그다음 발표까지 6개월 이상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교수가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개별 미팅을 진행하면서 중간중간 연구 진행 상태를 확인하고는 했다. 어떤 학생들은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연구실의 시스템에 불만을 갖기도 했다.
그런 그룹 발표가 이번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research가 아니었다. 연구가 진전된 게 없어서 발표할 만한 내용이 없는데 너무 다행이었다. 다만, literature로 타 연구진의 논문들을 살펴보며 발표를 진행해야 하는데 30 분정도의 분량으로 각종 논문들을 서치 해서 발표를 준비해야 했다. 보통은 메인 논문 한 편을 고르고, 이와 관련된 다른 논문들을 참고해 가며 일종의 리뷰논문형태로 발표를 준비하는 거다. 그런데 몇 주에 걸쳐, 내 연구 분야와 관련된 논문들을 살펴봤는데 메인으로 할 만한 재밌는 논문이 눈에 안 띄었다. 마땅한 논문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흐르고 흘렀다. 발표준비를 시작도 못했는데, 반년 전 계획해 둔 국제장애인기능대회를 위해 일주일간 다른 도시로 떠나야 했다. 짐을 챙기면서, 발표를 준비할 시간이 너무 없으니 가서 낮에 봉사활동을 한 후 밤에 발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무거운 내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노트북을 새로 사던 시절, 분자 모델링을 위한 컴퓨터 계산이 필요해 무거운 프로그램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 게이밍 노트북으로 무거운 노트북을 사버렸다. 후회 중) 노트북을 챙겨 들고 Metz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야 하는 날들도 있고, 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계속 바쁘게 움직였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서는 너무 피곤했다. 피곤한 상태에서 하기 싫은 발표준비를 하려니 의욕도 안 생기고 무엇보다 집중이 안되었다. 노트북을 열고 논문을 한 두 편 살펴보면서도 여전히 주제조차 정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그러다 며칠을 보내고는 여기서 발표 준비하는 걸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일단 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집중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Metz에서의 일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온 일요일에 반나절 동안 발표에 대해 어느 정도 초안이라도 짤 생각이었지만, 일주일이 피곤했는지 계속 자버렸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목요일 발표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로 출근을 하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체 나는 왜 이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나이 먹고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현실에 나의 회피적 성향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이제 정말 시간이 남지 않아서, 뭐라도 정해서 진행해야 했다. 어렴풋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던 내용을 주제로 정했다. 원하는 메인 논문이 없다면, 내가 리뷰논문을 쓰는 것처럼 주제를 정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그렇게 주제를 정하고 나니 지금까지 봐뒀던 논문들이 머릿속에서 대충 정리가 되면서 발표를 어떻게 진행할지 계획이 대강 세워져 갔다.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시간이 남는 중간중간 오피스에서 발표자료들을 준비한다. 처음 계획해서는 최소 10편 남짓한 논문들을 정리해서 보여주자 했지만 며칠간 발표자료를 정리하고 PPT를 만들면서 조금씩 조금씩 내용이 줄어든다. 완벽하게 할 수 없는 부분은 시간이 없으니 그저 빼버린다. 이래도 되나 싶게 발표준비를 막 한다. 뭔가 허전해서 마지막 부분에, 발표자료들과 관련되어 내가 생각해 뒀던 연구 아이디어들을 정리해서 추가한다. 뭐라도 채워 넣는다.
나는 이곳에서 불어를 못 하기 때문에 영어로 생활하고 있다. 다른 애들에 비해서 영어가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는 정도가 전부지, 자연스러운 스몰톡이라 그런 내추럴한 반응들은 영어로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한국에서 지낼 때에는 영어로 발표할 일이 있으면, 대본을 썼었다. 아주 초창기에는 대본을 외우려 애썼었고, 그다음에는 대본을 써가며 할 말을 생각해서 다듬을 뿐, 크게 대본을 외우려 애쓰진 않았다. 요즘은 대본을 쓰지는 않는다. 그냥 한국어로 발표 연습을 하듯, 영어로 그냥 발표 연습을 해볼 뿐이다. 조금은 나 자신이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영어에 대해서라면 말이다.
발표 당일이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다시 한번 쭉 내용을 살펴본다. 너무 짧고, 영 아닌 거 같다. 이래도 되나 싶다. 그래도 이제 시간도 없고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당당하게 발표하는 수밖에 없다. 9시 반에 그룹 미팅이 시작이라 15분쯤 그룹미팅 장소로 이동하여, 스크린을 내리고 마이크도 챙기며 발표준비를 마친다. 이곳 학생들은 그룹 미팅이어도 보스 (교수)보다 일찍 와서 기다린다던가 하는 일이 없다. 한국에서는 그룹 미팅 때 보통 학생들이 먼저 자리 잡고 기다리다가 교수님이 오시면 바로 미팅을 시작했었는데, 여기는 학생들이 늦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정말 시간을 잘 안 지키기도 하고, 교수를 불편해하기는 하는데 한국처럼 어려워하지는 않는 느낌이다. 35분쯤에야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발표를 시작한다. 발표는 어찌어찌 잘 진행되었다. 끝난 후, 질의응답시간인데 꽤나 많은 질문들이 몰렸다. 이런저런 답변을 계속하다 보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끝나고 친하게 지내는 포닥 동료가 발표 괜찮았다고 한다. 다만 조금 짧았다고 했다. 그래도 마쳤다는 사실에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다음번에는 이제 연구발표일 텐데, 내 발표 순서가 아마 6개월 뒤에야 있을 것 같지만 그 대까지 좋은 결과를 낼지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잘 될 것 같던 순간에도 계속해서 실험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얻어졌었기에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이다. 제발 6개월 후, 발표는 잘 정리해서 스스로 만족할 결과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