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색칠 공부를 해도, 조금만 바깥으로 삐져나오게 되면 그대로 엉엉 우는 일이 너무 잦았다고 한다. 그렇게 자라면서 나는 무엇을 해도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내 기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런 완벽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의 보호기작이 바로 나의 회피 성향이었다. 무언가를 완벽히 해내는 것도 뭔가를 할 때 얘기이다. 애초에 하지 않으면, 완벽하고 말고 아무것도 없다.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그렇게 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이 되었었다.
내 인생에서 많은 순간 나는 도망갔다. 항상 겉으로는 다른 이유를 댔다. 요리사가 되겠다고 꿈꿨던 적이 있다. 해외의 요리학교 입학허가도 받아두었다. 당장 며칠 후 떠나야 했다. 그러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온갖 걱정들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도망치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유가 필요했다. 부모님께 다가가 말했다. "저 아무래도 그냥 공부를 계속하려고요"
공부를 한다. 노력을 해서도 안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력을 하지 않기로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건 당연하니까. 나는 또다시 도망갔다. 열심히 하기를 포기한다. 적당히 한다. 그렇게 도망가는데도, 어쩌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건지, 그래도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열심히 하는 법, 최선을 다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다. 최근에 한 대학교에서 공고가 올라와 지원서를 제출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공고를 봐서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많았다. 요구하는 것들이 13가지는 되었다. 연구 계획서, 교육 계획서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제공된 양식의 서류에 필요한 경우 별지를 첨부하라고 적혀있었다. 급한 대로 서류를 작성해 본다. 잠시 고민을 하고는 쭉 써 내려간다. 해야 할 말을 다 썼다. 이렇게 빨리 써 내려가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금세 해치웠다. 마감일을 걱정했지만 다음날이 마감일이라 하루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더 살펴보고 더 다듬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더 노력하기를 포기한다. 큰 기대감이 없는 자리이고, 서류만에서 내가 떨어질 것이라 생각되는 자리였기에 이번에도 더 노력하기를 포기한다. 마감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다시 더 잘 작성하기를 포기하고 바로 지원서를 제출한다.
이런 일이 잦다. 어느 순간 조금 충동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냥 뭘 더 하나, 이 정도하고 안되면 마는 거지라는 마음으로 마지막에 냅다 제출해 버리는 서류들 말이다. 어릴 적의 완벽주의에서는 이제 완전히 벗어나버린, 그저 대충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다만, 여전히 내가 하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운 겁쟁이로 자라 버린 것 같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그렇다는 핑계를 댈 수 있지 않겠는가. 난 그렇게 비겁한 사람으로 자라 버린 거다. 완벽주의자가 회피성향을 가지면, 나처럼 비겁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당신이 완벽주의자라면, 설령 실망하는 일이 많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맞서자. 나처럼 노력조차 하지 않는 비겁한 도망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