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빼고 한국인의 밥상을 얘기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전 세계 어느 곳보다도 일상의 밥상에서 인스턴트 라면의 빈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 라면을 먹었던 것을 초등학교 때였는데, 그 당시에 내게 신라면은 어른들의 라면이었고 내가 먹는 라면은 진라면 순한 맛과 스낵면이 전부였다. 다른 라면도 있었겠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 속 라면은 이 두 라면이 전부였다. 종종 어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실 때면 라면이 짜고 몸에 나쁘다며, 라면 수프를 절반만 넣고는 양파와 파 등을 넣어서 끓여주셔서 라면이 맛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모든 수프를 다 넣고 제대로 끓인 라면을 맛보고는 새로운 세상을 찾은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학교에서 사물놀이 반에 들어가면서 주말 연습이 있었다. 학교에서 주말 연습을 한 우리에게 라면을 끓여줬는데, 내가 못 먹는 신라면이었다. 먹을 것이 그것뿐이니 호호 불어가며 매운 라면을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성장해서 매운맛에 둔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맵찔이지만) 분명 내 기억 속에 신라면은 지금보다 예전이 더 매웠다. 어느 순간, "어? 신라면이 고작 이 정도라고?"라고 느낀 날이 있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집에서 끓이는 라면보다 컵라면을 더 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작은 컵라면을 곁들이면 든든한 한 끼였다. 지금이라면 너무 감사하게 먹을 영양 가득 급식도 그 당시에는 그저 먹기 싫은 한 끼였기에 편의점의 자극적인 라면 맛이 더 좋았다. 지금은 예전보다 라면 종류가 훨씬 다양하지만,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도 점점 다양한 라면들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내가 학창 시절에 오징어짬뽕도 새로 나왔고, (그 당시 해물향 가득한 국물 맛이 새로워서 한참을 오짬에 빠져 지냈다.) 짜파게티만이 아니라 다양한 짜장라면들도 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다 하얀 라면의 시대가 잠시 도래하기도 했다. 다이내믹한 라면 시장을 몸소 체험하며 자라났다. 하지만 아무리 시장이 다이내믹하다 해도 항상 손이 가는 라면은 익숙한 라면들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것이 나와서 잠시 사 먹기도 하지만, 다시 오리지널로, 고전으로 돌아간다. (클래식은 영원하다고들 하지 않나.)
많고 많은 라면들을 거치면서 내가 선택하는 라면은 "진라면 매운맛", "열라면", "참깨라면" 그리고 컵라면은 "신라면 블랙", "육개장 사발면"이다. (뭐 물론 어떤 날은 튀김가락국수를 먹기도 하고, 양이 많은 왕뚜껑을 먹는 날도 있기는 하다.) 끓여 먹는 라면을 먹을 때, 나는 별다른 것을 넣지 않는다. 내가 넣는 재료들은 계란이 가장 잦고, 어쩌다 파와 김치, 어쩌다 숙주 정도이다. 잡다한 재료를 넣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채소를 넣는다고 파를 넣는 것은 인정하지만 라면에 양파를 넣는 것에는 반대한다. 익은 양파의 식감이 라면 면과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계란을 넣을 거라면 막판에 넣어 반숙 상태로 노른자라 흘러나올 수 있는 정도로 익힌 것이 좋다. 계란을 풀어버린다? 그건 라면의 국물 맛을 해치므로 선호하지 않는다. 라면에서 면의 익힘 정도도 중요하지 않나. 나는 전에는 내가 꼬들면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이건 마치 한 때 내가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요"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 어느 날 조금 아주 살짝만 더 익혔는데, 그게 더 맛있었다. 어쩌다 레스토랑에서 미디엄으로 구워버린 것이 더 맛있어서 내 취향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내 취향은 조금은 매운맛의 라면에 (너무 맵지는 않은) 김치를 넣어 같이 끓이거나, 아니면 파만 조금 넣어주고, 계란을 반숙으로 하여 꼬들면과 퍼짐면의 그 중간, 딱 잘 익은 정도의 라면이다.
라면에 대해 나만의 레시피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우리 집의 레시피가 하나 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라면이고, 아버지가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요리 중 하나인데. 바로 열무김치 라면이다. 이 라면을 위해서는 엄마가 먼저 이 라면을 위한 김치를 담가주셔야 한다. 그러니 사실상 요리는 엄마가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물김치는 보통의 열무 물김치보다는 국물을 자작하게 만든다. 그런 김치가 익으면, 물 반 김치국물 반으로 계량하여 끓이고, 라면 수프를 반만 넣는다. 열무와 면을 넣고 함께 끓여내면 완성되는 것인데, 라면 수프에서 오는 얼큼함과 동시에 김치국물 덕분에 시원함과 개운함이 함께 있다. 아무래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라면이라 그런지, 이 라면만큼은 아버지가 끓여줄 때가 가장 맛있고 온전한 맛이란 기분이다. 역시 음식은 단순히 맛이 아니라, 추억도 함께 맛보는 것이다.
라면은 워낙 오랫동안 일상 속에 있어왔기에 다양한 추억과 함께 하고 있다. 학창 시절 친구와 먹던 라면이거나, 대학생 때 밤새 술을 마시다 새벽녘에 편의점에서 해장으로 먹던 라면 맛이라거나, 친구들과 놀러 가고 다음날 누군가 끓여준 커다란 냄비 한가득 푹 퍼진 라면이라던가, 힘겨운 날 가까운 김밥천국에서 라면하나를 시켜 나를 위해 플렉스로 김밥까지 곁들여 먹던 날이나, 처음으로 간 캠핑에서 끓여 먹었던 라면이라던가, 여름 바닷가에서 맛본 해물라면이라던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러한 다양한 라면들이 삶 속 곳곳에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짜고 자극적이기에 건강에 나쁘다고 먹지 말라고 하기도 하지만 비록 섭취를 줄일지라도 라면은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한 계속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갈 음식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