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밴드"
내가 어릴 적부터 줄곧 들었던 아버지의 꿈이다.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하셨다. 어쩌면 고난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의 삶 속에서 음악은 자유로움이었을까, 아버지가 즐길 수 있던 유일한 예술이었을까.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학교 밴드를 했다고 했다. 아버지 세대 때 통기타가 유행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바로 유행과 함께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삼 남매에게 "가족 밴드"를 하자고 하셨다. 우리가 할 줄 아는 악기가 아무것도 없던 때부터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랬기에, 아버지는 우리가 악기를 배우고 싶어 한다면 아낌없이 투자하셨다.
언니, 오빠, 나 삼 남매 모두 부모님이 딱히 교육에 간섭을 하지 않으셨고- 자유롭게 자랐고 아버지는 우리의 교육에는 간섭도 없으셨지만 악기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언니와 내가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다고 하자, 직접 서울에 있는 악기상에 가서 예쁜 바이올린을 사다 주셨다. 난 고작 2주, 언니는 한 달을 배운 게 전부였다. 그 바이올린은 우리가 자랄 때까지 우리 집 어딘가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는 사라졌다. 오빠가 플루트를 배운다고 했다. 역시 얼마 가지 못했지만, 덕분에 우리 집에는 제법 괜찮은 플루트가 하나 있었다. 내가 대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금을 배우는 초보들은 보통 플라스틱으로 된 대금을 사서 배운다. 이제 겨우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때였나, 아버지가 나무로 된 진짜 대금을 사 오셨다. 나는 그 나무 대금을 한 번도 불어보지 않았다. (관리부터도 다르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언제나 악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출장이 잦았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던 때는, 이제 초창기니 바쁘셨고, 사업이 자리를 잡고 잘되던 때는 잘되니 바쁘셨다. 그러다 사업이 어려워지니, 또 어려워져서 바쁘셨다. 그렇게 집을 비우던 시간이 잦았지만, 아버지가 계신 날이면 주말 아침 집 안에 아버지가 듣는 노래들이 흘러나오곤 했다. 몇 년 전쯤 친언니와 대화하던 내용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흔히 물질적인 유산을 가지고 금수저, 흑수저 하잖아.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언니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부모님께 받을 재산이 많고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았잖아.
-우리가?
-응.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마음. 엄마로부터 식물을 사랑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마음.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 이미 많은 것을 물려받았어. 삶을 즐기는 소중한 것들을 말이야.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에 어느 날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새 기타를 사러 악기점에 가셨다고 했다.
- "너 혹시 베이스 기타 생각 없니?"
- "베이스 기타요?" 갑자기요 왜요?"
- "어, 악기점에 왔는데 여기 좋은 베이스 중고 매물이 있다."
- "전 베이스 칠 줄 모르는데요."
- "이제 시작하는 거지! 펜더 이거 중고가 200만 원 정도인데 상태도 좋고... 아까운데."
200만 원이란 말에 흠칫한다.
- "200만 원이요? 펜더면 좋은 거 아니에요?"
- "그럼 펜더면 최고 중 하나지."
그렇게 내가 생각해 보겠다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칠 줄은 모르지만 내가 언제 중고로 200만 원짜리 펜더 악기를 만지작거리겠냐 싶어 아버지께 며칠 뒤, 베이스 사주시면 배우겠다 말한다. 안타깝게 도 그때의 매물은 이미 나가고 없었기에 아버지는 대신, 원래 사려던 중고 200만 원의 판다 대신 쓰지 못한 200만 원으로 새 악기를 사다 주셨다. 예쁜 우드/베이지 색으로 된 아주아주 묵직한 베이스였다. 일본 브랜드 ESP 악기였는데, 한국에서는 쓰는 사람이 별로 없고 보통 메탈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브랜드라 내가 어딘가에서 이 베이스를 꺼내면 사람들은 오해하곤 했다. 내가 베이스를 잘 알고 잘 치는 걸로 말이다. 난 베이스 초짜인데 말이다.
얼떨결에 새 베이스가 생겼지만, 거의 2년을 시작도 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그러다 대학원을 가고, 학위만이 아닌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방 한편에 자리만 차지하던 베이스가 생각났다. 그날로 베이스 레슨을 알아보고 베이스를 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거의 10년이지만, 나는 10년 전 처음 베이스를 만졌을 뿐- 10년을 내내 열심히 연습하거나 하지 않았기에 나의 실력은 여전히 초보라면 초보다. 내가 베이스를 치고, 내가 커버한 것을 녹음해서 보내주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법 기준이 확고해서 내게 칭찬을 해준 적이 없다. 매번 연습을 더해야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지방의 아버지 집에 찾아갔다. 당근에서 베이스를 찾아 구해뒀다고 했다. 내가 오면 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아버지 집에 겨우 세 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그렇게 준비해 둔 아버지의 베이스였기에, 아버지 집에 찾아가서 애써 베이스를 꺼내 연습을 해보았다. 아버지가 옆으로 기타를 가지고 오셨다. 아버지가 부르는 여러 곡들의 악보를 잔뜩 꺼내며 내 앞에 함께 펼쳐낸다.
-"이 곡 아니?"
-"아뇨, 제목은 모르겠는데. 불러보시면 따라가 볼게요."
그렇게 아버지와의 첫 합주를 했다. 아버지가 먼저 시작하시면, 노래를 듣고 악보에 있는 코드를 따라 베이스 소리를 얹어본다. 아버지의 노래와 기타 소리에 나의 베이스 소리가 함께 깔린다. 관객은 없었다. 그저 어느 추운 겨울밤, 아버지의 집 거실에서 아버지와 딸이, 둘만이 둘만을 위한 그런 가족 밴드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