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네가 생각하는 삶의 답이야?

by 이확위

한 친구를 만났다. 아이가 동물을 엄청 좋아해서, "조련사"가 되고 싶다 말하기에 "수의사"가 되라고 설득시키는 중이라고 말했다. 아직 초등학교에 채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박하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친구의 대답은 이러했다.

"야, 네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


내가 세상을 모르는 걸까? 세상이 무엇인지, 어떠한가 생각해 본다.


나는 종종 이 사회의 자격주의에 대해 '이게 맞아?'라는 이질감이 들곤 한다.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의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면, 기사 제목에는 꼭 "의대생"이라는 말이 함께 붙는다. “공대생”이나 “경제학도”는 없다. 나는 그때마다 생각했다. 의대생이면 더 안타까워야 하는 걸까? 물론 의사란 직업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대단한 직업인 것은 맞다. 그들의 직업이 그들의 삶을 모두 대변해 주는 건가? 우리의 삶의 가치를 우리의 직업이 결정해 주는 건가?


동물을 사랑해서 조련사가 되겠다는 유치원생의 꿈이, 어째서 "수의사"로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어째서 그게 더 그 아이를 위한 삶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아이를 위한다는 그 마음이 그 아이에게도 "사회적 인정받는 직업이, 곧 너의 가치"라는 사고를 아이에게 심어주는 듯싶었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가 없으니 그런 거라고. 물론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나도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고 나 또한 자신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보다 더 많이 세상을 살아왔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살아보고 느꼈던 아쉬움이나 내가 이게 더 올바른 답인 듯하다 싶은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궁금했다. 그게 정말 네가 생각하는 삶의 답이냐고. 그 길로 가면 행복이 보장된다 생각하느냐고. 그 길이 삶에서 더 좋은 길이라 확신하느냐고.


무엇이 되기 위해, 무엇을 가지기 위해 달리는 삶이라면 나도 살아봤다. 그랬기에 가지지 못했을 때 좌절감과 나 자신이 가치 없게 느끼곤 했으니까. 물론 나의 경우, 어린 시절 트라우마적 경험들로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이 한 몫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조금씩, 나는 그런 나의 어둠과 우울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과정에서 삶의 목적을 더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로 말이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로 말이다. 나를 설명하는 말을 어떤 한 직업으로 정의 내려지고 싶지 않았다. 살아오며 사람들을 만나며 느꼈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한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3차원의 세상에 살아가고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 있듯이- 어떤 사람을 만드는 건 다층적인 모습이라고. 그러니 고작 "직업" 하나로 누군가를 평가 내리는 건, 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말하는 "네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난 차라리 그런 세상을 알고 싶지 않았다. 숫자나 지위가 불가능한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삶의 답은 삶의 목적, 어떤 존재일 것인가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확고함 속에서 온다고 본다.


얼마 전 한 친구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더 쫓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보이는 가치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들이 어쩐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 그런 것들로 내 삶을 더 채우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면 더 행복에 가까워질 것 같다고 말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숨을 고르고 하늘을 한번 바라보며

'오늘 하늘이 푸르네'

'오늘은 달이 밝네'

따스한 햇살에 주변을 둘러보고

'개나리가 폈네. 봄이 왔구나'


친구의 말처럼 내가 정말 세상을 모르는 걸까?


아직 아침 해가 뜨지 않아 오늘의 하늘이 어떤지 모르겠다.

문득,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오늘 당신이 마주한 하늘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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