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연장자가 회장이 되는 사회

[1부 제도와 권력의 무게]

by 어울리는음


동대표 선출 후 첫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의 공기는 제법 무거웠다.

긴 테이블에 동대표 열 명과 관리소 직원 두 명이 둘러앉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색했다.


막 입주가 시작된 단지라 모두가 낯설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출마 과정에서 제출했던 약력을 관리소장이 준비해 오긴 했지만, 그날 회의 자리에서 다시 펼쳐보는 이는 없었다.

몇 줄 적힌 직업이나 경력, 그리고 공약은 고요히 종이에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서로의 겉모습과 -근거 없이- 자신감 있는 자세를 읽으며 상대를 가늠하는 듯했다.

몇 사람은 앳띈 나를 보며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자리를 주도한 건 가장 연장자였다.

표준관리규약 규정에 따라 임시로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목소리가 크고 말끝을 확실히 끊어내는 그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흐름을 잡았다.

그가 말을 시작하면 공기가 그쪽으로 쏠렸다.


잠시 후, 갑작스럽게 임원 투표가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경력도 많으시고, 이끌어 주고 계셨으니 계속 맡으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눈만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회장이 확정되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후보 약력에는 글자가 꽤 많긴 했다.

나이만큼 열거된 그의 경력이 회장으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인지를 증명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아무튼 의장의 덕목인 소통 의지와 합리적인 판단력에 대한 포부를 읽거나 들을 수는 없었다.


후에 불통으로 고생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그날의 동대표들이 끄덕인 가벼운 동의에 무거운 추를 달고 싶다.

그러나 그 첫날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다음으로 부회장을 정하는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려 손을 들었다.


내가 추천한 그는 입주예비자협의회 사람들과 아는 사이였고, 입주 초기부터 동대표 출마 의향자들을 모아 움직였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직접 설득해 출마까지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나는 그가 회장으로 밀어주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가 회장 후보로 나설 줄 알았다. 그는 꽤 의욕도 있었고, 초면에 보여준 열의와 태도로 보면 대표단을 이끌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모으던 모습과 달리, 막상 회장 자리가 연장자에게로 흘러가자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물러섰다.


아쉬웠다. 그래서 직접 추천했다.

“부회장은 이 분이 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는 부회장이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상대적으로 적합한 누군가를 자리에 세우는 역할을 했다는, 작은 안도감 같은 것이 스쳤었다.

후에 별다른 활약을 못 펼치고 떠나버린 상황으로 인해 그의 열정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조직이 꾸려지기 직전에 겪었던 또 하나의 사건이 떠오른다.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예비 동대표 의향자들이 모여 있던 단톡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연말연시에 새해 인사를 한다며 한 남성이 이미지를 올렸다.

절을 하는 모습이었지만, 전통적인 의상은 아니었다.


물론 전통적인 의상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것은 여성의 상반신 전라로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림이었다.


그 단톡방 안에는 나 혼자만 여성이었고, 그 순간 나는 굉장히 불쾌했다.

아니 다시 떠오르는 지금도 생생하게 불쾌하다.


한동안의 정적 이후 한 남성이 간결하게 웃을 뿐, 나머지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침묵하고 말았다.

아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곧바로 ‘예민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결국 함께 동대표가 되었고, 그 일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만 남았었다.


사실 그는 500명 정도가 들락날락하던 입주민 단톡방에도 같은 이미지를 올렸었다.

그곳에서는 곧 삭제되었지만, 삭제 전 그 장면을 본 몇몇이 나중에 채팅이 오가던 와중 우연히 언급하며 지난 일을 지적했다.

그러자 그의 부인이 나서서 항의했고, 지적한 사람들에게 명예훼손 운운하며 고소 이야기를 꺼냈다. 분위기는 금세 살얼음판이 되었고, 결국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나는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다. 그 자리에 나가 과거 예비 동대표방에서도 내가 겪었던 일을 증언했다.

삼켜놨던 불쾌감이 하나도 소화되지 않았다는 듯 쏟아져 나왔다. 그는 제대로 변명 한마디 못한 채 조만간 공개사과하겠다며 큰소리를 쳤고, 자리는 어색하게 흩어졌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대표들이 줄줄이 사임하던 때였다.

그는 좋은 핑계를 얻은 듯 동대표 자리까지 내려놓고 자취를 감추었다.

자택에서 사업을 하는 부인이 여전히 주민을 상대로 홍보하는 것을 보면 아직 한 단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애석하지만 지금까지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두 장면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다.


공식적인 회의실에서의 투표 현장과 비공식 대화방에서의 껄렁한 농담.

누구도 따져 묻지 않고, 누군가의 불편함은 묻혔으며, 모두의 침묵이 결정을 대신했다.

그렇게 묵인된 분위기 속에서 대단지의 입주민 회장이 선출되었고, 성희롱은 사과받지 못했으며, 공동체는 불안한 첫 발을 내디뎠다.


그 자리에서 나 역시 끝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부분이, “이건 옳지 않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가장 어린 여자‘였던 나는, 안타깝게도 그 무게를 홀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침묵은 내가 선택한 방패였고, 그 방패가 나를 지켜주리라 믿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그 방패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삽이 되어 문제를 더 깊이 묻어버린다는 걸.


우리는 그렇게 첫 단추를 끼웠다.

그리고 그 단추가 삐뚤게 꿰어졌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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