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도와 권력의 무게]
대표들이 줄줄이 무책임하게 사임한 뒤, 회의실은 긴 침묵에 잠겼다.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니 회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단지 내의 중요한 일들이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멈춰버리자, 그 공백은 단순한 정지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벽처럼 다가왔다.
대표회의의 공식적인 참견이 없으니, 관리소가 임의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단지 예산의 세부 집행, 작은 유지보수, 공용시설 운영 방식 같은 것들이 입주민의 의논이나 동의 없이 결정되었다.
늘어진 잡초는 정글처럼 얽히고설켜갔으며, 고쳐야 할 것은 늦게야 수리되거나 아예 미뤄졌다.
필요한 곳에는 돈이 쓰이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곳에는 비용이 들어갔다.
누군가 감시하거나 조율하는 눈길이 사라지자, 관리소의 편의가 곧 원칙이 되었다.
나는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표회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지만, 문제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비교적 바른말을 해오던 주민들에게 출마를 권해도, 막상 생계나 가정을 이유로 고개를 저었다.
“회의가 저녁마다 열린다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겠어.” “괜히 욕먹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아요.” 모두 사양하기 바빴다.
쉽게들 말로는 “관리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비난하면서도, 정작 대표회의 자리에 나서고 싶진 않아 했다.
그 와중에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입주 전까지 입예협 회장을 맡았던 사람이었고, 온라인 소통에 적극적이어서 주민들 사이에 지지가 많았다.
1기 대표회의의 불통에 대해 내가 내부고발을 했을 때, 입예협 출신 주민들이 앞장서서 대표회의를 비난했을 만큼 그 조직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다.
주민들은 늘 입예협과의 비교를 했고, 동대표단에도 “입예협처럼 소통하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그러니 ‘검증된 사람’ 일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가 오류치고 썩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가 보궐로 대표회의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나는 안심하고 말았다.
나는 점점 개인적인 친분까지 두터워졌다.
그는 나처럼 젊었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 같은 단지의 젊은 엄마들끼리 등/하원 시간 외 무언가의 활동을 더 같이 한다는 건 어색한 우정을 넘어 끈끈한 전우애가 생기기 십상이다.
주민들 사이에서의 평판, 과거의 활동, 그리고 내가 직접 느꼈던 친근함까지 더해져서 나는 그를 진심으로 믿었다.
마침내 보궐선거 이후 1기 대표회의가 재출범하며, 그가 부회장으로까지 선출되었으니, 이제는 무언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가 나도 모르게 커졌다.
하지만 설레발은 또다시 나를 내동댕이 쳤다.
남은 1기 대표회의 임기동안의 회의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열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표들끼리 의견이 충돌할 때면 금세 집중력을 잃었고, 회의가 길어지면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중요한 안건이 오가도 차분히 의견을 펼치기보다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그가 부회장이라는 자리를 왜 수락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지 적응이 필요한가 싶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그에게 책임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입예협 시절의 활발한 소통은 신뢰를 얻기 위한 연출이었을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훗날, 그 의심은 다른 형태로 증명되었다.
불륜과 이혼 문제로 그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어느 날 갑자기 단지를 떠났고, 그 과정에서 카톡을 갑자기 탈퇴하며 그가 방장이던 대규모 입주민 단톡방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수백 명이 오가던 대화와 정보의 장이 공중분해되었으나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미 나는 그의 가족들을 걱정할 정도로 관계가 맺어진 상태였기에 이 충격적인 스캔들은 나에게 놀라움보다도 슬픔과 분노를 안겼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충격으로 변한 것은 입예협 시절 주민들이 모금한 공금을 자기 개인 계좌에 남겨둔 채 떠나버린 것이 한참 나중에서야 드러났을 때이다.
입예협 주최로 열린 입주 박람회 참가 업체들의 흔적이 그의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인지하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허탈했다.
이 충격은 나에게 단순히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일탈’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한때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그 믿음을 배반당한 감각이 나를 한동안 허물어뜨렸다.
나의 판단력을 스스로 의심하는 수준에 이르며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당시 나를 흔드는 것이 부회장에 대한 실망이나 임신으로 인한 역경뿐만은 아니었다.
보궐로 어렵게 겨우 정족수가 채워졌던 대표회의. 새로 합류한 그들은 또 신선한 혼란을 주었다.
어떤 이는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회의 시간을 훈화 시간 삼으며 타인의 의견은 묵살하는 취미가 있었고, 어떤 이는 개인적인 민원만 해결하러 왔다며 -동대표가 아니라 방청 온 주민에 가까웠다.-고집을 부리고, 또 다른 어떤 이는 관리 부실 사사건건 책임소재를 따져 묻는 데에만 온 집중을 쏟느라 건설적인 대화로 나아가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긋한 연세에 비해 비교적 소통 의지가 높던 동대표 동기가 보궐 이후 회장자리를 맡았는데, 안타깝게도 유하고 친절한 그의 성품은 회의를 이끄는 데엔 영 재능으로 쓰이지 못했다.
회의실은 늘 산만했고, 다양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회의 시간은 길어지는 데도 결론은 매번 다시 다음 회의로 미뤄졌다. 대화가 아니라 높은 언성만 오가는 날도 있었다.
게다가 동대표가 부족해 회의가 열리지 못하던 긴 시간 동안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왔고, 때로는 참지 못해 날을 세운 말들을 앞다투어 뱉어냈다. 어떤 이는 관리 부실이 대표회의 책임이라는 듯 몰아세웠고, 어떤 이는 개인적인 민원을 해결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 동 주민도 아니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러 방청석에 앉아 있기도 했다.
내가 임신 증상으로 몸이 힘들어 회의 중간에 조퇴한 날에는, 온라인 공간에 “대표할 자격이 있냐”며 공개적으로 비꼬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일일이 시시비비를 따지며 반박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런 일이 있는 날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긴 밤을 뒤척여야 했다.
그 때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보면, 1기 후반은 ‘대표회의’라는 이름만 겨우 유지해 간 시기였다.
관리소의 임의 집행, 주민들의 모순된 태도와 악의적 비난, 그리고 기대와는 달랐던 보궐 대표들과 임원단의 무력한 모습. 그 모든 혼란 속에서 나는 수없이 흔들렸다.
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마치 고립된 산속에 살고 있는 듯한 외로움을 느낀 날도 많았다.
그러나 자리를 지켰던 이유도 결국에는 사람이었다.
나를 믿고 소란을 자제하던 선비 같은 우리 동 주민들.
회의 뒤에서 응원과 영감을 불어넣어 줬던 나의 이웃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 혼란의 시기는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내 안에 지독한 책임감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새겼다.
나는 끝까지 버티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