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하나 된 펜 끝에서 시작된 반란

[2부 임대 단지의 벽]

by 어울리는음


임시조기분양추진위원회가 꾸려진 뒤, 첫 회의의 결론은 명확했다.


우리끼리 인정하는 명칭만으로는 공신력이 약할 수 있다.

공식적인 조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민주적으로 ‘입주민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중에 혹시라도 추진위의 정당성이나 감정평가 권한 문제를 두고 이견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회의 끝에 위원들은 서명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입주민의 서명이 곧 권한의 근거가 될 것이었다.


각오한 대로 준비는 전적으로 위원들의 몫이었다.

관리소에 협조를 요청해 보기는 했지만, 역시 돌아온 답은 “관여할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가 직접 마련했다.

서명지 양식, 인쇄, 볼펜, 테이프까지 모두 사비를 모아 준비했다.


다음 문제는 부착이었다.

대단지를 돌며 서명판을 부착하기에 몇 명의 추진위원만으로는 다소 벅찬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부착 자원자’를 모집했다.

사실, 작정하면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노린 전략은 일손을 모으는 동시에 ‘주민이 함께 움직인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더 필요했던 것이다.


온라인 카페와 입주민 단톡방을 통해 공지를 띄웠다.

“엘리베이터 라인별로 서명지를 부착해 주실 분을 모집합니다. 필요한 물품은 제공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바로 응답했다.

“저희 라인은 제가 맡을게요.”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녁을 부지런히 먹고 상기된 얼굴로 주민카페를 찾은 주민들을 서명지와 펜, 테이프가 맞아주었다.


위원들은 참여자들에게 설명했다.

“엘리베이터 눈높이에 서명지와 안내문을 붙이시고, 펜도 잘 부착해 주세요. 다 붙인 후에는 인증사진을 단톡방에 올려 주세요.”



단톡방에 사진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진을 모아보니 사진마다 종이의 위치와 각도는 달랐지만 마치 조화로운 모자이크 같았다.

서명을 본격 받기도 전이었지만 이미 추진위를 인정받으며 출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부터는 서명지가 빠르게 채워졌다.

이름이 빽빽하게 적히고, 가지각색의 서명날인이 하나의 펜 끝으로부터 춤춰지고 있었다.


낙서가 더러 섞이는 아이들의 장난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서명지를 보호해 주었다.

“낙서하지 말아 주세요.”

누군가가 직접 써서 포스트잇을 붙여둔 곳도 눈에 띄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고, 만약을 대비해 추진위원들은 동을 나눠 돌아다니며 서명지를 회수했다.

게시했던 회수일정보다 훨씬 이른 날짜였다.


백지에서 깜지로 금의환향한 서명지는 한 장, 두 장씩 쌓여 갔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놀라웠다.


서명률 84.6%.

전 세대 중 천이백 명이 넘는 주민이 이름을 남겼다.


찬반을 묻는 투표가 아니었으니, 그 종이에 이름을 적은 사람들은 곧 추진위의 활동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 서명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조기분양전환 과정에서 추진위원회가 감정평가사를 선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한다는 안내를 담고 있었고, 그것이 이후 절차의 핵심이 되는 조항이었다.



서명운동이 마무리된 후, 위원회는 내부 임원을 선출했다.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감사.

나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서류 및 자료 관리, 일정 조율, 공지사항 안내 등 이미 내가 하고 있던 역할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다.


위원장은 나와 같은 동에 살고 있는 한 중년 남성으로 선출되었다.

대부분의 위원들은 부녀회장에게 위원장을 맡으라고 하였지만, 부녀회장과 나는 여러 이유로 그에게 위원장직을 제안했다.


공식적인 자리에는 다양한 얼굴이 필요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부녀회가 주도적으로 추진위를 만들게 된 만큼, 활동주체가 모두 여성들에게 쏠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또 그는 부녀회원의 배우자로 종종 행사를 통해 주민들에게 자주 보이는 얼굴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2기 동대표로 후보등록도 해둔 상태였으므로 생뚱맞은 인물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위원장직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에 그만한 열정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마디로 그건 전략이자 배려였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회의를 꽤 자주 열었고, 문서와 계획도 차근차근 쌓였다.


서명지를 정리하며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우리가 할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펜 끝은 조용히 움직였지만, 그 한 획 한 획이 모여 거대한 의지를 남겼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그렇게 ‘조직 없는 단지’에서 ‘의지를 가진 공동체’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