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교체는 분열이 아니라 지켜내기 위한 합의다

[2부 임대 단지의 벽]

by 어울리는음


조기분양추진위원회가 서명운동을 마친 뒤 단지는 잠시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서명률은 84%를 넘었고, 숫자만 봐도 신뢰와 의지가 엿보였다.

추진위는 어느 정도의 공신력을 얻게 되었고, 앞으로의 여정이 조금은 수월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단체의 내부는 서서히 균형을 잃고 있었다.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위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그는 마을 단체 활동 경험이 꽤 있었고, 나름 리더의 품이 느껴졌다.

단체장으로서의 욕심도 분명했다.


아쉽게도 정작 우리 단지의 일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중에는 2기 대표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실질적인 활약은 없던 부분은 비슷하다.


겉모습만 보면 안정적인 중년 남성이 우리 단체를 맡고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 사무국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회의가 반복될수록 빈틈은 점점 드러났다.


회의 개최나 간담회 일정 조율, 외부 연락, 문서 정리, 대외 홍보까지 모든 것이 내 손을 거쳐야만 돌아갔다.

사무국장이 많은 일을 맡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건 분담이 아니라 대체였다.

그는 결정을 미루는 데 익숙했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보다 회피했다. 조직을 대변하는 리더의 존재감이 보이지 않았다.


외부 간담회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연합회에서 내려온 자료를 읽고도 핵심을 잡지 못했고, 질문이 이어지면 내가 다시 설명해야 했다.

요약본을 만들어 나눠주면 그대로 읽는 수준이었다.


홍보와 주민 소통은 더 어려웠다. 게시글 하나 올리는 것도 매번 “사무국장님이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라며 미뤘다.

책임감보다는 피로감이, 리더십보다는 관망이 앞섰다.


내가 버거움을 느낄 때쯤 리더의 공백을 메운 사람은 부위원장이었다. 그는 부녀회장이기도 했다.

꼼꼼함보다는 추진력이 앞섰고, 감정의 진폭이 큰 편이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때로는 직설적인 언행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바로 그 에너지 덕분에 단체는 굴러갔다.

더불어 우리는 신뢰가 단단했고, 추진위의 중심축은 점점 그와 나로 옮겨갔다.



그즈음 단지 내부의 가장 큰 현안은 관리소장 또는 업체 교체였다.

분양 추진 과정에서도 관리소의 소극적인 태도는 한계를 드러냈다. 요청하는 자료는 늘 늦었고, 행사 협조는 사사건건 말이 많았다.


부위원장이 나섰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적극적으로 교체를 추진해야 되겠어요.”

그때 위원장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동대표 회의에 참관하셔서 말씀하시면 될 것 같네요. 쉬운 문제는 아니니 준비를 많이 해오셔야 되겠어요.”


순간 부위원장의 얼굴빛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다 같이 논의하던 일 아닌가요?”


그 말에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위원장의 회피권법을 넘은 유체이탈 화법에 경이로워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동대표회장이었으며, 조기분양추진위원장이었다.

앞장서서 총알받이가 될 용기는 없을지언정,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는 없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공기와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부위원장은 무슨 말을 이으려다 말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더 이상은 어렵겠습니다. 그만둘게요.”


그 순간 나는 딜레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사람에 대한 예의와 공동체의 방향 사이에서, 어디까지 참아야 하고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만의 싸움이었다.


인간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현재 단체의 중심축이 누구인지, 앞으로의 일을 이끌 사람이 누구인지 내 이성 깊은 곳에서는 이미 명확한 상태였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위원장을 잃으면 단체는 멈출 것이고, 위원장이 그대로 있으면 방향을 잃을 것이었다.


나는 우선 부위원장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버텨봐요. 우리 여기까지 왔잖아요.”

“위원장이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위원장에게 여러 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늘 한 박자 뒤늦게 문자로 “요즘 너무 바쁩니다. 조만간 뵙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피하고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은 그 만을 위해 흐르지 않는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부녀회원이자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그의 아내에게 도움을 구했다.

사정을 조심스레 설명하고 남편과 한 번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다소 놀란 듯,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얘기 나눠 볼게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내심 기분이 상했을 텐데도 그렇게 답해줘서 고마웠다.



일주일 후, 위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위원장직을 포함해 위원회도 그만두겠습니다.”

애써 별 문제 아니라는 듯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책임감보다는 체념이 더 배어 나왔다.


그래도 나는 안도했다. 감정이 터지기 전에 이렇게 정리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의 사퇴 후 추진위는 잠시 정적에 잠겼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부위원장이 새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외부의 시선을 고려해 중년 남성 위원에게 부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여전히 사무국장으로 남았다.


단체의 구조는 한결 단단해졌고, 일은 훨씬 빠르고 명확해졌다.

회의는 정리되고, 결론은 흔들리지 않았다. 추진위는 이제 이름에 걸맞은 ‘움직이는 조직’이 되었다.


난감하고 다소 불편했던 분열은, 결과적으로 싸움이 아닌 합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웃과 이웃 사이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지만, 그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추진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때의 용기는 누군가를 몰아내는 힘이 아니라, 함께 남을 사람을 지켜내는 의지에서 나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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