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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Apr 12. 2024

선영아 사랑해



남편이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말하라고 눈짓한다. "엄마, 저도 가고 있어요." 애들 학교나 보낼 일이지 뭐 하러 같이 오냐고 핀잔하신다. 밝은 목소리다.


 

며칠 뒤 부모님 건강 검진이라 몸 상태가 어떤지 살피려고 아버지께 전화했다. '선영이냐?'를 마치자마자 기침을 되게 하신다. 놀라 어디 편찮으시냐고 다급히 물었다. 엊그제 중국 여행을 하고 오셨다. 여독이려니 참았는데 열이 높아 응급실에 다녀왔다고 한다. 한결 낫다며 걱정하지 말라 신다. 응급실 의사가 주말 지내고 '호흡기 내과'로 오라고 했단다.



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집안 불이 다 켜져 있다. 거실에 계시는 어머니는 자다 깬 얼굴이다. 애들은 어떻게 했냐고 먼저 묻는다. 챙겨 먹고 학교도 잘 간다고 하니 기특한 새끼들이라며 흐뭇해하신다. 아버지 있는 방으로 갔다. 티브이 소리가 크다. 귀가 나빠지신 모양이다. 등을 돌리고 옆으로 누워 있다. 주무시나 어깨에 손을 가만히 대고 얼굴을 넘어다 봤다. 눈을 뜨더니 '아이고, 우리 선영이'하며 몸을 일으킨다. 내 손을 꽉 잡는다. 나도 힘을 주었다. 많이 앓으셨나 보다. 얼굴이 해쓱하고 살이 쏙 빠졌다. "밥 안 먹었으면 얼른 먹어" 아, 이 밤에 밥이라. '선영아, 사랑해.'라는 뜻일 테지. 아이들 크는 얘기로 한참 웃다, 티브이를 꺼 드리고 방에서 나왔다. 씻고 작은 방에 이불을 폈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손에 들고 누웠다. 읽다 잠이 들었는지 책이 얼굴로 떨어졌다. 코를 맞았다. 아프다. 남편이 죽는다고 웃는다. "자기는 왜, 나 사랑해?" 헛소리 말고 불이나 끄란다. 왜 맨날 나냐고 한바탕 실랑이를 했다.

 


된장찌개 냄새에 잠이 깼다.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른다. 눈을 뜨자마자 먹는다. 여섯 시 30분이다. 풀약(제초제) 줄 데를 지시받은 남편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고 어머니는 거실 티브이를 켰다. 나는 설거지 끝내고 어제 읽다 만 책을 챙겨 어머니 옆에 앉았다. 아버지가 우편물 하나를 가지고 나한테 왔다. 여기로 전화해서 이 돈은 도대체 언제쯤이나 타 먹냐고 물어보란다. 어머니 국민연금이다. 아홉 시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전화기 속 여자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상담원 연결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가 복잡하신 모양이다.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졸음이 쏟아진다. 그대로 누웠다. '인간극장' 음악 소리에 눈이 떠졌다. 셋이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보았다. 프로그램이 거의 끝날 무렵 남편이 들어왔다. 병원 가자며 빨리 준비하라고 재촉이다. 남편과 아버지는 씻으러 각자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밖 수돗가에서 세수와 양치만 했다. 외출복으로 갈아 있고 소파에 앉았다. 지루하게 채널을 이러저리 돌렸다. 아홉 시. 핸드폰으로 '1355'를 눌렀다. 두 분 어려워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결했다. 내년 9월까지 내고 10월부터 받는다.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어 보이는지 스무 살 적이나 지금이나 나를 대하는 게 같다. 나는 그게 좋아 즐긴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한 척하다, 사소한 것 하나를 야무지게 해 내면 엄청 기특해하시므로. 어머니만 집에 남고 차에 탔다. 농협 앞에 세우라고 하더니 현금을 찾아 나에게 주었다. 병원비 계산하라며. 돈 못 버는 며느리, 곤란할까 걱정되었나 보다. 어쩐담. 나는 생각도 안 했네. "아빠, 병원비가 이렇게 많이 나올까요? 남으면 저 가져요?" "엄마 갖다 줘."



군산에서 가장 큰 상급 병원이라 꽤 크다. 나는 내가 모시고 다닐 요량으로 같이 왔는데 아버지가 구석구석 잘 아신다. 그러게. 신경외과, 정형외과 단골이시지. 아버지도 병이 많다. 졸졸 따라만 다녔다. 이것저것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 앞으로 왔다. '송을용'님을 부른다. 팔을 잡고 함께 들어갔다. 의사는 심드렁하게 "별 이상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기관지 확장증'이 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행이다. 약국에서 약을 타 집으로 왔다.



남은 돈을 싱크대 젤 위 어머니 돈 바구니에 놓았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또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지붕 비 새는 데가 있어 실리콘 작업을 해야 한단다. 어머니는 퇴비 열 포대를 텃밭에 갖다 놓고 감나무 가지치기까지 부탁한다며 웃었다. 나는 리모컨을 챙겨 소파로 갔다. "자기는 오늘 휴가네." "어떤 여자가 휴가를 시댁으로 올까요? 앉아 있어도 가시방석이라우."


 

아버지가 '선영이'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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