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구멍만으로 숨 쉬는 게 힘들어 입도 벌렸다. 그런데 화가 난 것 같지 않고 빨리 걸어 숨이 찬 것만 표시가 나 다시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었다. 콧구멍이 둘레가 크고 단단해졌다. 모퉁이를 도니 가로수에 몸이 반쯤 가려진 남편이 보인다. 쏟아 낼 말을 입 안에 가득 담고서 경보 선수처럼 걸었다.
신호등 초록색 사람이 깜박이자 그이가 뛴다. 횡단보도에 한 걸음 내디뎠는데 빨간 사람으로 바뀌어 버려 걸음을 뒤로 물린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할 말을 되뇌며 그러는 남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입은 잠바가 집에선 선명한 베이지였는데 그새 바랬는지 아이보리에 가깝다. 왼쪽 어깨가 오른쪽보다 내려앉았고 납작한 뒤통수에 흰머리가 성성하다. 전보다 허리는 훨씬 굵은데 엉덩이는 빈약하고 그 아래 뻗은 두 다리는 가늘다. 그래, 내버려 두자. 그렇지 않아도 초라한 인생에 구질구질한 걸 더 얹혀주어 나아질 게 뭐람. 또는 니네 집은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냐고 핀잔이라도 한다면 그건 너무 근원적인 질문이라 길에서 울고불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당신은 계속 세계 평화를 꿈꾸소서.'
양팔 벌린 길이만큼 서로 떨어져 초록불이 되길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그이를 앞서 맞은편 바로인 은행 안으로 들어왔다. 에이티엠 기계에 통장을 넣는데 남편이 문을 열고 와 뒤로 멀찍이 선다. 나는 통장을 넣고 이체 버튼을 눌러 기계가 하라는 대로 계좌 번호와 보낼 금액을 입력했다. 통장을 다시 받아 들고 뒤에 남자는 모르는 모양으로 눈을 문에 만 고정하고 밖으로 나왔다. 롯데슈퍼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이가 따라오는지 어쩌는지 궁금했지만 앞만 보았다. 마트에 다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일은 힘들었다.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어떤 여자가 스쳤다. 생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꼭 그것만 사야 하는 건 아니다. 이곳엔 물건이 무궁무진하니까. 과일, 야채 코너를 지나 냉장 식품을 둘러보고 생선과 고기 좋은 게 있는지 살폈다. 애들 먹을 과자를 하나 살까 하고 그리로 갔다. 전 같으면 지나는 데마다 물건을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을 텐데 오늘은 무엇도 고르지 못했다. 아무 흥이 나지 않는다. 이 마트엔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만병의 근원은 부부싸움이 아닌지. 아, 돈을 아꼈으니 좋은 점도 있다. 음료 진열장으로 가 삼다수 2리터 한 병을 집었다. 여섯 개가 들은 한 묶음이 필요한데. 900원을 계산하고 자동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어떤 손이 물를 확 빼앗는다. 놀라 얼굴을 보니 아는 남자다. 이게 다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다. 또 나를 앞질러 간다. 좀 빨리 걸어 옆으로 서려다 조금 남은 자존심이 문제가 되어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또 그이의 색 바랜 잠바를 보며 걸었다. 아무 흥이 나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는 기분을 한 달 유지한다면 돈을 많이 절약할 수 있겠다. 그 아낀 돈으로 아웃렛에 가 가을 잠바를 하나 사야지. 남자 것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큰 소리가 난다. "자기야, 자기야! 빨리 와 봐." 아, 내 남자! 아파트 입구에 서서 팔을 높이 들고 손짓한다. 갑자기 저 밑에서 흥이 난다. 웃음이 났지만 마지막 자존심, 이는 내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먹을래?" 그제야 남편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얼굴이 새카맣고 몸이 깡말라 허수아비가 옷을 입은 것 같다. 걸친 헐렁한 남방은 빨아도 빨아도 때가 지워질 것 같지 않다. 피둥피둥하고 말끔한 차림을 내가 더 부자일지도 모르겠다. 현금이 없다고 난색 하자 계좌이체도 된다며 바지춤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우리에게 건넨다. 하나은행 계좌번호가 적혀있다. 남편은 "남은 것 다 주세요."라고 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모양으로 뭘 다 사냐고 했다. "어르신, 영암에서 오셨어요? 버스 타고 가시려면 힘드시겠어요." 별 걸 다 걱정하는 남자다. "나? 저그 그랜저 보이제? 운전해서 왔어. 그라고 나 오룡 푸르지오 살어."
"거 봐, 당연하지 않잖아. 허름해서 가난할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보다 어마어마한 부자고만. 조금만 사도 되는데 뭐 하러 몽땅 사!" 기어이 한마디 쏘아붙이는 내 옆에 바짝 붙더니 입술을 귀 가까이 댄다. "자기가 좋아하잖아." 나는 기어이 이를 다 드러내고 말았다. 잠바를 못 사도 모두가 웃었으니 세계 평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