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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03. 2024

나는 나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요


무엇이 되고 싶었더라? 섬마을에 살며 내가 본 직업은 농부와 선생 그리고 목사밖에 없다. 온몸이 까맣게 되도록 일을 해야 하는 농부는 진짜 별로다. 살은 하얗지만 착하게 살아야 할 것 같은 목사는 매력이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장래희망 칸에 '선생님'이라고 썼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뭘 이루려고 노력 한번을 안 했지만 나는 내가 꽤 근사한 어른이 될 줄 알았다.



"황옹졸 선생님 맞으시죠? 응시 번호는." 전자 우편으로 접수한 사람에게는 전화로 번호를 알려주나 보다. 오른손에 든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주머니에 든 전화기를 왼손으로 꺼내 통화 버튼을 눌러 겨우 귀에 댔다. 날이 추워 냄새가 안 나니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하루이틀 모은 양이 상당하다. 비닐이 터질까 조마조마하다.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 왔다. 손이 무겁고 숫자 버튼을 눌러야 해서 상대방 말의 서술어가 끝나기도 전에 "네네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려가며 10층에서 두 명, 6층에서 한 명이 탔다. 모두 미간을 잠깐 찌푸리고는 손을 코에 댄다. 불쾌한 냄새. 민망하여 몸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 큰 소리로 '죄송합니다.'를 외쳐야 하나? 어쩡쩡히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1층까지 왔다. 한나절은 걸린 것 같다. 수거함에 쓰레기를 쏟았다. 아유, 시원해. 집으로 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그런데 아까 번호 뭐라고 했더라? '180번입니다.'이라고 들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헷갈린다. 뒤에 일의 자리 수가 붙었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모르겠다. 합격이면 연락 주겠지.


 
'무슨 내가 되리라고.'하는 마음과 '모르지, 진이 다 빠지도록 자기소개서를 썼잖아.'라는 생각이 왔다 간다 한다. 마음을 어느 쪽으로 다잡고 있어야 충격이 덜 할까. 가슴이 간질거리며 답답하다. 적당한 약 없나? 청심환은 없고 타이레놀이라도 먹을까. 마렵지도 않은데 변기에 가 앉고, 아까 한 양치를  또 하고 물을 뜨겁게 마셨다, 차갑게 마셨다, 홈페이지를 들락날락 쑈를 한다. 그러면서 친구들한텐 '전혀 기대가 안 돼.'라고 하며 '호호호.'하고 웃었다. 아무 연락이 없는데 합격자 공지는 올라왔다. 안 되었나 보다. 그래, 그럴 줄 알았잖아. 입술이 닫히고 코의 숨이 무겁다. 문서를 클릭했다. 응시번호 183번, 184번이 명단에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빨리 뛴다. 혹시? 아니다, 나는 180번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개별로 통지했겠지. 저녁이나 먹자. 쌀을 씻는다. 요즘 햅쌀이라 밥이 너무 맛있어. 그래, 그건 그래. 그런데 혹여 내가, 183번이나, 184번인데 면접에 안 간다면?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황선영 님, 면접장입니다. 왜 안 오십니까, 포기하시는 건가요?'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전화해서 물어볼까? 그래서 아니면 대박 창피하잖아. 아니야, 그렇다고 계속 껄쩍지근하게 살 수는 없지. 번호를 눌렀다. "예, 선생님, 수고하십니다. 서류 합격자에게 개별 연락이 갔죠?" 남자 목소리가 실처럼 가느다랗다. "아닙니다. 홈페이지에만 공고합니다." 심장아 나대지 말아라. "아, 그래요? 죄송한데 응시 번호가 헷갈려서요. 확인 좀 해주세요." 생년월일과 전화번호를 말하라고 한다. 알려주었다. "황옹졸 선생님은 188번입니다. 아쉽네요. 지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슴이 따뜻한 남자로구먼. 나도 인사했다. "뭘요, 저도 고맙습니다."



나는 나는 자라서 '근사한 구직자 선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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