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그릇에 담긴 '소통'의 기술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여우'의 오너셰프인 이수혁은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20년간 한식의 정수를 지켜온 그의 레스토랑이 처음으로 미쉐린 스타를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MZ세대 미식 평론가들 사이에서 "여우는 너무 꽉 막혀있다"는 혹평이 나돌았고, SNS에서는 "#여우_OUT"이라는 해시태그가 트렌드에 오르내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수혁은 죽염으로 숙성시킨 최고급 장에 절인 제철 생선회를 바라보았다. 3대째 내려오는 비법 간장은 물론, 30년 경력 도예가가 만든 청화백자 위 플레이팅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젊은 고객들은 더 이상 그의 레스토랑을 찾지 않았다.
그때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건 새로 부임한 수셰프 학이었다. 하필 미슐랭의 평가를 앞둔 시점에서 학 셰프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셰프님, 저희 한식의 본질은 지키되,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구상한 메뉴가 있는데..." 이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네. 자네같은 요즘 젊은이들은 몰라. 진정한 한식은..."
하지만 학 셰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일 저녁, 제가 한 코스만 선보이게 해주세요. 고객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신 후 결정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이수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좋아, 내일 저녁 한 코스만이야."
다음 날 저녁, 이수혁은 자신의 시그니처 디시인 '전복 물회'를 내놓았다. 청화백자 그릇에 완벽하게 플레이팅된 요리였다. 그러나 학 셰프가 내놓은 건 긴 유리 소주병을 개조한 용기였다. '한강의 밤'이라는 이름의 이 요리는 소주병 아래쪽부터 문어 숙회, 미나리 청, 된장 크럼블, 들기름 폼이 층층이 쌓여있었고, 손님들은 긴 유리 스푼으로 아래까지 파고들어 한 숟가락에 여러 맛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
이수혁은 황당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손님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음식을 먹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체험이 되었고, 손님들은 웃으며 서로의 숟가락질을 도와주었다. SNS에는 이 독특한 플레이팅의 사진이 연이어 올라왔다. "#여우_혁신" 해시태그가 새롭게 트렌드가 되었다.
그날 밤,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후 이수혁은 학 셰프를 불렀다. "자네 요리의 맛은 인정하지만, 이건 너무 파격적이야. 우리 한식의 품격이..." 학 셰프가 말을 이었다. "셰프님, 제가 어제 셰프님의 전복 물회를 처음 먹어봤습니다.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그릇에 담긴 각자의 진심을 보지 못하고 있던 건 아닐까요?"
이수혁은 잠시 침묵했다. 학 셰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셰프님의 전통과 제 새로운 시도가 만나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셰프님의 전복 물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이수혁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학 셰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6개월 후, '여우'는 미슐랭 스타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올해의 혁신 한식당'으로 선정되었다. 이수혁과 학 셰프는 '세대를 잇는 한식'이라는 새로운 메뉴를 선보였다. 전통 한식의 본질은 지키되,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플레이팅과 먹는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미슐랭 가이드는 이렇게 평했다. "여우는 한식의 전통과 혁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진정한 미식의 장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한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에이미 에드먼드슨 교수는 그의 저서 「두려움 없는 조직」에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의견과 관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조직 문화야말로 혁신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이수혁과 학 셰프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심리적 안전감이 어떻게 조직의 혁신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다.
세계적인 조직문화 연구가 에드거 샤인은 "문화는 공유된 암묵적 가정"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수혁이 고수하던 '전통 한식'이라는 가정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은 바로 이런 문화적 가정의 상대성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갈등 해결의 방식이다. 조직심리학자 캐런 호튼은 "진정한 소통은 상대방의 그릇에 맞추어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 셰프가 제시한 '한강의 밤'은 단순한 요리가 아닌, 새로운 소통 방식의 은유였다. 기존의 평면적 플레이팅을 벗어나 수직적 경험을 제안함으로써, 고객들에게 새로운 참여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수혁의 전문성과 학 셰프의 혁신적 시각이 만나 시너지를 이룬 것처럼, 진정한 혁신은 기존의 전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과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진정한 소통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는 마치 서로 다른 그릇에 담긴 물이 결국 같은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 칼 로저스 (인본주의 심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