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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검은 도끼, 은도끼, 금도끼, 그리고 진실

정직이 위험한 시대, 우리는 어떤 도끼를 들어야 하는가?

by 황코치
0_0.jpg 정직이 위험한 시대, 우리는 어떤 도끼를 들어야 하는가?


"최 부장님, 이번 프로젝트 실적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요. 목표치까지 채우려면 어떻게든 손을 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태성 부장은 모니터에 띄워진 실적 보고서를 긴 한숨과 함께 바라봤다. 작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경기침체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실적 압박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김 과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잖아. 이 정도면 됐어."


"아니, 부장님. 그게... 전무님께서 오늘 중으로 보고서를 올리라고 하셨거든요. 이대로 올리면..."


말끝을 흐리는 김 과장의 표정이 어둡다. 최 부장은 책상 한켠에 놓인 아들 사진을 바라봤다. 내년이면 대학에 들어가는 아들이다. 등록금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모니터 화면이 깜빡이더니 꺼져버렸다. 블랙아웃이다.


"아, 이걸 어쩌죠? 방금 전까지 작업하던 파일은..."


김 과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최 부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USB를 꺼내들었다. 오전에 백업해둔 파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원본 데이터였다. 아직 '손보기' 전의 파일.


정전으로 어두워진 사무실 창 너머로 갑자기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이 저절로 켜지더니, 세 개의 폴더가 나타났다.


'Black_Report', 'Silver_Report', 'Gold_Report'


호기심에 첫 번째 폴더를 열어보니 실제 데이터 그대로의 보고서가 있었다. 두 번째 폴더에는 적절히 수정된, 그럴듯해 보이는 보고서가. 마지막 폴더에는 화려한 실적으로 가득한, 완벽에 가까운 보고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당신이 선택한 보고서가 당신의 진짜 모습입니다."


최 부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세 가지 선택지 앞에서 그의 머리 속은 복잡해졌다.


검은색 보고서를 선택하면... 아마도 프로젝트는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부서 전체의 연봉 삭감은 물론, 최악의 경우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은색 보고서는... 적당히 체면을 살리면서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만한 수준이다. 다들 이 정도는 한다고 하지 않던가.


금색 보고서라면... 승진은 물론 특별 보너스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들 등록금 걱정도 덜 수 있고...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떨리고 있을 때, 문득 20년 전 신입사원 시절이 떠올랐다.


"최 사원, 자네가 이번에 정직원 전환 대상인데... 지난 분기 보고서에서 몇 가지 걸린 게 있어서 말이야."


당시 부장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신입 시절의 그는 실수를 숨기려다 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모든 걸 털어놓았다. 예상과 달리 부장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정직은 리스크가 아니라 투자라네. 당장은 손해 볼 수 있어도, 결국 그게 가장 큰 자산이 되는 법이지."


화면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엔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최종 선택입니다. 어떤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최 부장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 과장, 전무님께 보고 올리기 전에 우리 팀원들 다 모아봐.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자고."


검은색 폴더를 클릭하는 순간, 나머지 두 폴더가 사라졌다. 그리고 화면에 마지막 메시지가 떴다.


"당신은 도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선택했습니다."


며칠 후, 팀원들과 함께 준비한 새로운 프로젝트 제안서가 경영진의 눈에 들어왔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팀원들의 진정성이 통했던 걸까. 회사는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로 했다.


최 부장은 퇴근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금과 은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프란시스카 지노(Francesca Gino) 교수는 저서 「정직하지 않은 진실(The Real Truth About Dishonesty)」에서 "정직과 부정직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상황적 맥락과 조직 문화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의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현대 조직에서 '정직'이라는 가치는 세 가지 차원에서 도전받고 있습니다.


구조적 압박 업무 성과와 실적에 대한 과도한 압박은 때로는 '창의적 회계'나 '선의의 과장'이라는 회색 지대를 만들어냅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조직행동 연구에 따르면, 실적 압박이 심한 조직일수록 구성원들의 비윤리적 행동이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집단적 합리화 "다들 이 정도는 한다"는 인식은 강력한 자기합리화 기제로 작용합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Dan Ariely)는 이를 '전염성 있는 부정직성(Contagious Dishonesty)'이라 부르며, 한 사람의 부정직한 행동이 조직 전체로 확산되는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모호한 경계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 '정직'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관리자급 직원들의 73%가 "완벽한 정직과 업무 효율성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정직'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해야 합니다. 와튼스쿨의 아담 그랜트(Adam Grant) 교수는 장기적 관점에서 정직이 가져오는 신뢰의 가치가 단기적 이익보다 크다는 것을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했습니다.

둘째, 투명한 소통 문화를 구축해야 합니다. 실패나 실수를 숨기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이 보장될 때, 구성원들은 더 정직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직'의 새로운 정의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조직심리학자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은 "진정한 정직은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라고 정의합니다. 최 부장이 보여준 것처럼, 진정한 정직은 단순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체의 지혜를 모으는 적극적인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정직이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비싼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보상이다."
- 워렌 버핏 (투자가,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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