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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숯장수와 표백공의 다른 발걸음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협력의 시작이다

by 황코치
0_2.jpg 숯장수와 표백공의 다른 발걸음

새벽 강가. 하얀 김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물가에서 표백공 하진은 천을 두드리고 있었다. 매일 이른 아침, 세상이 잠든 시간에 그의 두드리는 소리만이 강가에 울려퍼진다. 철썩. 철썩. 천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하얗게 튀어 오른다.


마을 외곽의 작은 오두막. 숯장수 강목은 장작을 쌓아올리며 숯가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장작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다. 까맣게 변한 손가락 끝으로 장작의 방향을 살피고, 간격을 조절한다.


두 사람은 20년째 이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웃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어긋난 관계였다.


"저 사람은 도대체가..."

하진은 매일 아침 숯가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한숨을 쉰다. 바람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피워 올린 연기가 자신의 빨래터로 날아오기 일쑤다. 하얀 천에 검은 그을음이 앉으면 다시 빨고, 두드리고, 말려야 한다.


"흠..."

강목은 매일 저녁 강가에서 들려오는 두드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다. 밤새 숯을 굽느라 겨우 눈을 붙이려는 순간, 철썩이는 소리가 그의 잠을 방해한다.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진에게 강목은 배려심 없는 이웃이었고, 강목에게 하진은 고집스러운 완벽주의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큰 가뭄이 찾아왔다. 강이 마르기 시작했고, 우물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진은 천을 두드릴 물이 부족해졌고, 강목은 숯을 굽는데 필요한 장작을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저... 강목씨?"

20년 만에 처음으로 하진이 강목의 오두막을 찾아갔다.

"숯가마에서 나오는 재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재물로 천을 삶으면 물을 덜 쓰면서도 하얗게 표백할 수 있거든요."


강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진씨가 천을 두드릴 때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장작을 적시지 않을까 늘 걱정이었거든요. 하지만 요즘 보니 그 물보라 덕분에 먼지가 덜 날리는 것 같아요."


둘은 처음으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하진은 강목에게 천을 표백하는 과정을, 강목은 하진에게 숯을 굽는 방법을 설명했다. 서로의 일을 이해하게 되자, 그동안의 오해가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제가 천을 두드리는 시간을 조금 늦추면 어떨까요?"

"제가 바람 방향을 잘 살펴서 연기가 빨래터로 가지 않게 하죠."


가뭄은 두 달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변했다. 하진은 아침마다 강목의 숯가마에서 나오는 재를 얻어 천을 삶는다. 강목은 하진이 두드린 젖은 천을 숯가마 근처에 널어두어 먼지를 막는다.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두 사람. 하나는 새하얀 천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까만 숯을 만든다. 정반대의 색을 다루는 두 사람이지만, 이제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강목씨, 이번에 제가 표백한 천으로 만든 옷 한 벌 가져왔어요."

"고맙습니다. 저도 숯 한 바구니 드릴게요. 숯으로 구운 삼겹살 맛이 기가 막히거든요."


이제 마을 사람들은 이른 아침, 하얀 물보라와 검은 연기가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며 미소 짓는다. 서로 다른 색이 만나 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연구한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같은 것만 있다면 도무지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존재들이 만나고 부딪히며 관계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창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숯장수와 표백공의 이야기는 '갈등'과 '협력'이라는 인간관계의 두 극단을 모두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들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전환점이다.


하버드 대학의 협상 전문가 윌리엄 유리(William Ury)는 그의 저서 'Getting to Yes'에서 "진정한 협력은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이해관계(interest)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숯장수와 표백공의 경우, 가뭄이라는 위기 상황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통찰이 담겨있다.


첫째, '차이'를 '틀림'으로 해석하지 않는 태도다. 다양성 연구의 권위자인 로버트 켈러(Robert Keller)는 "차이는 결함이 아니라 자산이다"라고 말한다. 숯장수의 재가 표백공의 일을 도울 수 있었던 것처럼, 서로의 다른 점이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둘째, '소통'의 시작점에 대한 교훈이다. 20년간 쌓인 오해가 한 번의 대화로 풀리기 시작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직심리학자 에드거 샤인(Edgar Schein)은 "대부분의 조직 문제는 소통의 부재가 아닌, 소통의 시작점을 찾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협력(cooperation)이며, 이는 우리가 서로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숯장수와 표백공이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고 도움을 주고받게 된 것처럼, 진정한 협력은 상호의존성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통찰들은 우리의 일상적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동료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웃을 마주한다. 그때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통'을 시작할 용기가 있는가? '상호의존'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가?


결국 숯장수와 표백공의 이야기는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차이'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색을 만드는 두 사람이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 것처럼, 우리의 차이도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색이 모여 무지개가 되듯, 서로 다른 생각이 모여 지혜가 된다."
- 마하트마 간디(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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