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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Aug 16. 2016

단 하나의 장면,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e, 1998


결정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선택이 얼마나 어렵고 긴장되는 작업인지.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다. 아메리카노를 고르면 모카가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듯하고, 짜장을 고르면 짬뽕이 왠지 더 맛있어 보인다. 그렇다, 선택이, 결정이, 어려운 이유는 내가 마음속으로 고른 답이 못나서가 아니라, 배제한 답이 '배제할 만큼 부족하거나, 못나지 않다' 라는데 있다. 그만큼 선택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모진 마음과 과감한 결단력, 뒤돌아보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더 쉽다고 생각하는 객관식 답을 고르는 일 보다 차라리 보기 없는 주관식 문제가 나을 수 있다.  


물냉인지, 비냉인지를 고르는데 조차 뇌의 모든 메모리를 사용하는 평범한 우리에게 십 수년 혹은 수십 년의 기억에서 단 하나의 것만 골라내는 일은 어쩌면 고문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골라낼 멋진, 가치 있는 추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라기 보다, 단 하나만의 장면을 골라낸다는 것은 수백, 수천 가지의 기억들은 배제시켜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내 인생의 단 하나의 장면을 골라내는 일. 이런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 닥친다면 어떨까. 더구나 선택한 한 장면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며칠로는 부족할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는 삶을 나누고, 누군갈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단골 물음인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영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르는 과정과 그 과정을 담담히 지켜보는 영화'이다. 그래서 '원더풀 라이프'라는 영화 제목과는 조금 다르게, 영화를 보고 난 후 따듯한 마음과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삶이 단 하나의 장면과 순간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나머지 다른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으로 소거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의 행복한 기억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 그 과정에서 어떤 기억을 꼽았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기억들을 소거했는 지다. 배제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은 결국 특정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을 선택하는 작업 자체에 담겨 있다'는 이동진의 영화평 속의 문장은 공감된다. 어떤 시절의 기억을 배제했는지, 누구와의 시간을 소거했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영화 속 '죽은 이'들이 선택하는 단 하나의 장면들을 보면 다양하다. 어린 시절 빨간 구두와 빨간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순간을 꼽은 할머니, 세 살 때 엄마가 무릎에 누운 자신의 귓밥을 파주던 장면을 선택한 소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와 영화를 본 후 벤치에 앉아 덤덤히 이야기하던 기억을 선택한 할아버지. 십여 년, 수십 년의 삶의 순간 속에서 그들이 꼽은 장면들은 어찌 보면 소박하기도 하고,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화려하고, 찬란했던 순간들 보다는 순수하고 따듯한 기억들이다. 혹은 가족과의 시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정신적으로 교감했던 순간들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결국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이 아닐까. 그 사람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마음으로, 눈빛으로, 살갗으로, 향기로 나눴던 시간이 아닐까.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2, 30초가량 생각한 후 답변을 해야 한다면 '행복'이라는 단어의 속성 중 '기쁨'과 '환희'에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하지만 선택의 시간을 영화에서 처럼 며칠 가량 충분히(?) 준다면 그 보다 '평안', '사랑', '순수'라는 기준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그것이 더 가치 있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 인생의 수많은 시간들 중 배제와 소거의 과정을 통해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는 엄중하고, 때로 잔인하기까지 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 따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가 인물들의 선택의 태도를 신중하고 진중한 모습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단 하나의 장면을 손쉽고, 섣불리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소녀만이 디즈니랜드에서의 비교적 대중적(?)인 기억을 얘기했다가, 결국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소박한 '귓밥 파주는 엄마의 무릎'으로 선택을 바꾼다. 영화 속 '죽은 이'들의 단 하나의 장면을 영화로 만들어 주는 인물들이 '단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지 못한 이'들이라는 설정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그중 한 순간을 선택하는 일은 영원한 행복이라는 대가를 유보시킬 정도로 어렵고도, 신중한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개인에게 있어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의 세계이며, 이야기이자 영화 같은 것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가장 큰 힘이자 남김은 그것이 결국 영화를 보는 당사자에게 마지막 질문과 선택을 남긴다는 것이다. 영화는 우연히든, 대충 내용을 알고 봤든, 영화를 본 모두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친한 친구가 묻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과 같은 가볍고, 밝은 느낌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유언을 남기듯 과거의 시간을 신중히 복기하며 하나하나 골라내는 엄숙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질문이다.



당신에게 인생의 단 하나의 장면은 무엇입니까?


영화를 본 후 묵직한 돌 하나가 가슴을 누르는 이 느낌은 영화 속 '죽은 이'들과 같이 결국 단 하나의 장면을 골라내기 전까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잠시 잊혀질 수는 있으나, 삶의 어느 순간에 다시 저 질문이 머릿속에 튀어나올 때, 지나온 시간과 기억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는 것보다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더 큰 원동력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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