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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Jun 07. 2016

잃어버린 정체성, <초록물고기>

Green fish, 1997

한국 영화감독들의 작품 중 어떤 한 작품이 아닌 그 감독의 전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쉽지 않다. 허나 이창동 감독은 예외다. 중학교 시절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초록물고기'를 시작으로 최근(?) 작품인 '시' 까지. 그의 작품들은 순간 재미있는 휘발성 강한 영화들과 달리 지루하고, 진부하지만 두 번 보고 싶게 만든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갖는 또 다른 공통점은 영화의 배경과 주인공과 화법은 다르지만 큰 범주 안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잃어버린 정체성과 순수이든, 사랑이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든, 혹은 그런 삶 앞에서의 인간이든. 그 어떤 감독 못지않게 전체 작품의 색깔과 던지는 메세지는 일관되어 있다.


시골 학교 국어 선생님, 소설가를 거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생각했던 각본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인 '박하사탕'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인감독으로서의 첫 작품으로는 '박하사탕'의 익숙지 않은 플롯의 전개와 진부한(?) 스토리가 적합하지 않았는지 주위에서 만류했다고 한다. 결국 갱스터 장르(?) 라는 외피를 싸고 첫 작품인 '초록물고기'를 만들었다. '초록물고기'는 영화의 대부분이 어둡고, 주요 인물들이 조폭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어깨형님(?)들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감독이 어느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주인공인 막동(한석규)과 그의 가족(진짜 가족과 배태곤(문성근)의 두 번째 가족)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막동은 군대 전역 후 돌아오는 기차에서 미애(심혜진)와 우연한 만남을 갖는다. 장밋빛 스카프를 매개로 이어진 인연은 영등포 3류 깡패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배태곤으로 이어진다. 스물여섯이라는 꿈 많은 나이임에도 특별히 하고 싶었던 것도, 이루고 싶었던 것이 없었던 순수하면서도 그만큼 현실과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던 막동은 그저 어렸을 적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사는 것을 꿈꾸며 배태곤에게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된다. 사실 가족이 함께 모여사는 것이 진짜 막동이 원했던 꿈이었는지 영화만 보았을 때는 명확하지 않다.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나간 나들이에 행복은 없다. 장애인인 첫째 형과 알콜중독자인 둘째 형 그리고 다혈질 성격의 야채장사 셋째 형과 다방 레지로 일하는 여동생 까지. 그토록 원하던 가족의 모임 속에서도 주변인이 되어 차로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막동. 어쩌면 막동은 가족이라는 마지막 꿈이자 정체성 속에서도 안정과 확실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마치 '박하사탕'의 영호가 자전거를 탄 채 빙글빙글 돌며 잃어버린 자신의 순수함과 사랑 속에서 절규하고 혼란스러움을 표현했듯이.



명확한 꿈도 아니, 스스로의 위치와 정체성도 알지 못했던 막동에게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한 배태곤의 배려(?)와 명령은 절대적이면서 속 시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막동은 배태곤의 말 한 마디에 전 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손가락을 자해하고, 그의 전화 통화 하나에 그나마 분명했던 미애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기회를 포기하고, 심지어 대신 살인을 저지른다. 그것은 결코 목적과 의도가 있는 굳은 결정과 확고한 행동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무목적성과 무의미로서의 적극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이다. 다방 레지로 일하던 여동생에게 돈은 내가 벌 테니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했던 막동은 뒷골목에서 '이런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이 단순히 돈은 아니다. 충분히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둘째 형처럼 야채장수라도 하며..) 그러지 않았다. 막동에게 뒷골목의 일은 그저 미애라는 인물을 통해 우연히 맺어진 배태곤과의 인연으로 주어진 일일 뿐이다. 거기엔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다.



막동에게는 그저 초록물고기를 잡는 다며 쓰레빠를 잃어버린 철없는 어린 시절이 있을 뿐이다. 전역하고 신도시로 변해버린 동네(일산),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 속에 발맞추어 따라갈 수 없는 막동은 순수하면서도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1997년의 스물여섯 막동은 1971년생이자 경제개발의 계획 경제 세대로서 산업화와 도시화를 몸으로 겪은 세대다. 세계사에 유례없이 빠른 현대화를 거친 대한민국. 그중 가장 집중적으로 경제개발이 이루어졌던 70, 80년 대는 인간의 몸과 정서가 정상적으로 적응하는 시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는 시대였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 비정상적인 속도로, 이상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어쩌면 비정상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막동의 주변인적 모습과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지만, 그렇기에 도태되기도 하는 슬픈 일반성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간직하지 못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막동의 어린 시절로 시작하여, 막동이 죽고 난 후  미애가 오열하며 보는 막동의 옛날 집 사진과 지금의 집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인생은 몇 장의 사진으로만 남듯, 그렇게 사라져 간다.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생명이 아스라이 사라져도 세상은 돌아가고 시대는 흘러간다. 씁쓸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에서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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