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바라볼 때 느끼는 숭고함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쁜 꽃, 나무를 바라볼 때 느끼는 아름다움과 거대한 대지와 깎아지르는 듯한 계곡과 절벽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숭고함에는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 또는 절대가치에 대한 무의식적인 복종이 담겨 있다. 그것의 본질은 무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이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들.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절대자의 영역은 인간에겐 두려움 그 자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얼음장같이 차가울 것만 같은 시퍼런 바다. 끊임없이 거칠게 육지를 때리는 파도 그리고 꿈적도 하지 않는 바위와 풍경들. 그 배경으로 들리는 웅장한 관현악기와 차가운 파도소리. 영화 리바이어던은 그렇게 시작한다. 거대한 자연의 모습들 속에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의 숭고함이 느껴지는 바다와 파도. 그리고 육지
영화의 제목인 '리바이어던'은 성경의 욥기와 홉스의 책으로 유명한 단어이자 개념이다. 전자는 욥기 41장에 나오는,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바다괴물 '리워야단'이고, 후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사회 계약설'로 유명한 정치사상가 홉스의 저서 제목이다. 전자가 인간에 펼쳐진 불가항력적인 비극과 그것을 바라보는 피조물로서의 태도 그리고 절대자에 대한 굴복과 순종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면,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국가, 정치권력의 절대성과 나아가 폭력성을 의미한다.
안드레아 즈비아긴체프 감독이 정확히 어떤 의도로 영화 제목을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여러 영화 평론가들의 평과 다양한 영화 리뷰들을 보면 결국 두 가지 중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 후기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본 후 홉스 보다는 욥기의 리바이어던의 의미가 더 강렬히 남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극들, 소용돌이처럼 빠져드는 고통의 문제 속에서 '이해가 하나도 안돼요', '왜 하필 나일까'라는 질문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전함. 절대자의 뜻과 권력 속에서 그저 복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운명. 그런 인간의 한계를 바라보는 청 묵색 바다 같은 차가운 영화의 시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이 시작과 동일하게 바다와 파도, 바위를 건조하게 바라보며 끝나는 것으로 명확해진다.
콜랴의 집은 끝내 철거 된다. 묵묵히 서 있는 배경의 바위산과는 대조적이다.
알콜 중독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는 러시아 작은 마을에서 자동차를 수리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다. 그런 그에게는 몇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작은 고민은 재혼한 릴랴(옐레나 랴도바)와 아들 로마와의 관계가 별로라는 것이고, 큰 걱정거리는 마을 시장이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집을 부수고 강제수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큰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친구인 변호사 드미트리(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가 모스크바에서 콜랴가 사는 마을까지 와서 시장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다. 하지만 경제와 종교, 주먹(?) 세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을 시장에게 콜랴와 드미트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마을 시장 바딤. 세상에서는 권력자이나 절대자 아래선 그도 피조물에 불과하다
시장에게 죽음 직전의 협박을 당한 드미트리는 릴랴와의 불륜까지 들통나면서 결국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시장에게 억압당하고, 믿었던 친구와 아내에게 배신당한 콜랴에게 닥친 현실은 소송에서의 패배와 릴랴의 자살이라는 비극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억울하게도 콜랴는 릴랴를 죽인 가해자로 지목되어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콜랴가 할 수 있는 건 물음 뿐이다
그런 콜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느때처럼 손에서 놓지 않고 보드카를 마시는 일과 절대자와 친분도 없는 동네 신부에게 '왜 하필 나인지', '이유가 무언지'를 건조히 묻는 일뿐이다.
폐허가 된 교회당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바라보는 성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덤덤히 신부에게 묻는 질문.
자비롭고 전능한 신은 어디에 있느냐
기도하고, 신을 찾는다고 해서 죽은 아내가 돌아오느냐
그런 콜랴에게 신부는 성경 욥기 41장의 이야기를 해준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욥에게 그의 소유물을 쳐도 하나님을 향해 찬양할까 라는 사탄의 의문으로 인해 비극과 시험이 시작된다. 그의 재산, 가족, 건강, 친구 모두 떠난 절망적인 비극의 상황 속에서 그는 결국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오묘한 섭리 안에서 이뤄짐을 깨닫게 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리워야단'을 통해서 인간에게 있어서 비극의 불가항력성과 그것을 대하는 순종적인 태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욥의 이야기를 해준 신부에게 콜랴는 묻는다. 왜 현실적인 물음에 선문답 하느냐. 지어낸 이야기냐.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결국 절대자의 영역을 다루는 '신부'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말하는 것을 다 믿지는 못하는 콜랴. 하지만 머리로,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전면 부인할 수도 없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한계. 그것은 왜 헛소리하냐 라며 신부에게 면박을 주면서도, 무거운 장바구니는 집까지 들어다 주는 콜랴의 이중적인 모습 속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는 단순히 비극 앞에서의 무력한 인간의 모습만 그리지는 않는다.
평범한 소시민을 돕는 사실과 진실을 믿는 변호사. 그 위에서 폭력과 기만으로 공격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시장. 그러면서도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변호사의 공격에 불안해하는 시장과 그런 불안을 '신'으로부터 위로받으려는 시장. 그런 시장과 세속적으로 결탁하지만, '진리'와 '진실', '용기'를 이야기하는 '신부'.
영화를 보고 난 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욥기의 리바이어던과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뒤섞여 절대자의 뜻과 섭리, 그런 절대자의 영역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세상 속의 리바이어던. 두 가지의 리바이어던은 각기 의미가 다르지만, 그것이 모두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영역과 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절대자의 권력과 세상의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피조물로서의 인간. 그런 인간들 위에서 세상의 권력을 잡고 있지만 불안해하는 이들. 아울러 절대자의 권력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종교인들. 그런 인간들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신과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하는 자연. 영화를 본 후 허망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포스터의 장면처럼 무력감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