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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Apr 08. 2018

분노와 회심,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2017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는 담백하다. 자극적인 조미료 없이 콩을 갈아 소금간만 한 체 얼음 동동 띄워먹는 콩국수처럼, 영화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담백하다. 강간, 살해당한 딸의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에 분노하는 엄마의 고군분투기라는 자극적인 설정에 비해 영화는 비교적 무덤 하게 그려낸다. 있을 법한 딸의 살해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유력한 범인을 찾아내 잡으러 가는 도중에 무심한 듯 영화는 끝난다. 요즘(?) 영화치고 115분이라는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도 영화의 담백함에 일조한다.


담백하다고 심심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치밀한 각본과 완벽한 연기에 마음속으로 박수치게 된다.

형식적으로 깔끔하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영화의 주제가 이렇다 저렇다 분명하지 않지만 분명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옳은 가치를 건드린다. 삶 속에서 분명하지 않은 동기임에도 행동과 사고에 원동력이 되듯, 영화는 선과 악, 분노와 회심 그 중간 어딘가를 자극한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딸을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분노한다. 그 분노는 경찰과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서장, 윌러비(우리 해럴슨 분)에게로 향한다. 세 개의 광고판이 분노 표출의 방식이 되고, 분노는 점차 폭력과 응징으로 확장된다.


딕슨(샘 록웰 분)은 존경하는 경찰서장 윌러비의 죽음이 밀드레드의 비난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밀드레드에 분노한다. 분노는 밀드레드와 주변 인물에 대한 폭력과 응징으로 나타난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는 서로 다른 분노라는 동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에는 밀드레드와 그녀의 직접적인 분노의 대상인 윌러비, 그를 존경하는 딕슨과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이루는 듯 하나, 윌러비 서장이 췌장암 말기로 고통받다 자살하면서 밀드레드와 딕슨의 대결 구도로 정리된다.


하지만 이 둘의 대립은 아이러니하게도 불분명하게 엇갈려있다. 광고판에 불을 지른 것이 경찰이라고 생각하는 밀드레드의 오해와 경찰서에 불을 지른 것이 광고판 소유자인 웰비(캐일럽 랜드리 존스 분)라고 착각한 딕슨의 오해는 엇갈려 부딪히며 불분명한 대립으로 이어간다.   


서로 다른 이유로 분노하는 밀드레드와 딕슨에게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두 인물 모두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분노를 정당화할 만큼 온전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밀드레드는 강간, 살해당한 딸에게 쌀쌀맞은 엄마였다는 죄책감을 지니며, 그로 인한 분노를 거칠고 폭력적으로 이웃에게 풀며 해소하는 걸걸한 인물이다. 딕슨은 성소수자이자, 흑인과 장애인을 무시하는 차별주의자로 묘사된다.


두 번째 공통점은 결점을 지닌 인물들이 나름의 정의를 폭력으로 표출하는 데 있어 영화 후반부 반성과 회심으로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반성과 회심의 이름으로 이들은 극적인 방법적 선을 추구한다기보다 정립되지 않은 채 방향을 바꾸는 결단과 행동을 한다. 아직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은 채로 그들은 생각과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

쓰리 빌보드의 인물들은 윌러비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윌러비는 자신을 모욕하는 밀드레드에게 분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말기 암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가족들에게 완벽한 아버지이자, 닉슨에게는 무결점의 선배이기도 했다.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밀드레드와 닉슨은 조금 다르다. 현실에서는 딸의 살해범을 잡지 못하는 경찰에 대한 분노가 경찰서장의 자살과 몇 가지 에피소드로 사글아 들지는 않는다. 또한, 현실에선 회심했다고 해서, 반성했다고 해서 생각과 행동의 동기가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영화 속 밀드레드와 딕슨은 완전한 마음 정립 이후에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불완전한 회심과 불분명한 방향성, 불확실한 방법을 지닌 채 길을 나선다. 서로에게 영원한 악도 아니며, 완전한 선도 아닌 그들은 설거운 연대를 한 채 행동에 나선다.


영화는 그렇게 열린 결말로 끝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밀려오는 지독한 현실감은 씁쓸했다. 허나 가치와 선택에 있어 모든 것에 불완전하고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갖는 본질적 한계가 아닌가. 그런 한계와 불확실함이 어쩌면 영화의 열린 결말처럼 알 수 없는 삶과 그에 대한 기대와 불안함이 되어 역설적이게 삶의 원동력이 된다. 쓰리 빌보드는 내게 불확실하지만 우선 길을 나서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영화로 남았다.



영화썰전, 김대리 대 김선생 제17화 <쓰리 빌보드>

바로가기 ☞   http://www.podbbang.com/ch/1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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