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rs, 2003
삶을 살아가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모두가 바라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면서도 불행하다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사랑 속에서 느끼는 고통은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가
'영화를 보고 난 후 곱씹으며 음미할 수 있는 영화'가 진짜 좋은 영화 라는 관점에서,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 <디 아워스>는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그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감정과 고통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그저 우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화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의 늪에 얕게라도 발을 담가보고, 빠져나오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해본 이들에게 이 영화는 알 수 없는 위로와 고요함을 선사한다.
영화 <디 아워스>는 원작인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소설 <디 아워스> 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설 <디 아워스> 역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에 영향을 받고 쓴 소설이다. 즉, 영화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그에 걸맞게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941년 영국 리치몬드.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는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 남편 레너드 울프(스티븐 딜레인 분)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작품을 쓰며 살고 있다. 조용한 리치몬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데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불안한 정신 상태이지만 그런 불안정과 혼란을 동력으로 소설 <댈러웨이 부인> 집필을 한다.
195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분)은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좋아하는 화목한 중산층 가정주부다. 자상한 남편 댄 브라운(존C. 라일리 분)과 사랑스런 아들 리차드, 멋진 집과 차, 그리고 이웃이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일상에 고통을 느낀다. 남편의 생일 케잌을 만들기 위해 서툴게 레시피를 보며 노력하면서도 얼굴엔 슬픔과 권태로 가득 차 있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생일날 자살을 결심하며 집을 나온다.
2001년 미국 뉴욕. '댈러웨이 부인'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출판 편집자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 분)은 옛 애인인 리차드 브라운(에드 해리스 분)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꽃을 사며 분주하게 파티를 준비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리차드는 그렇지 않다. 동생을 낳고 가족을 떠난 엄마 로라의 아들인 리차드는 깊은 상처를 갖고 살아왔다. 작가로서의 성공과 사랑하는 사람의 극진한 케어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로 결국 클라리사 앞에서 창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영화는 서로 다른 시대에 세 여인의 하루를 다룬다. 시대는 다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로 연결된 세 여인은 모두 레즈비언이며, 명확치는 않지만 켜켜이 쌓여온 상처와 그로 인한 일상의 아픔, 권태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 하루의 비극과 극적인 사건이 아닌, 수년의 세월이 쌓여온 단 하루의 이야기인 것이다. 물리적 시간으론 하루지만, 그 시간의 깊이는 세월이라 부를 만큼 깊으며, 그곳에 침잠해 있는 고통은 이렇다 저렇다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진하다.
세 여인의 각자의 하루를 다룬 영화이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은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몸을 던지는 장면과 남편 레너드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어요. 마침내 그것을 깨닫게 되었고, 삶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제 그 삶을 접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레너드. 우리가 함께 한 세월, 소중한 시간들. 영원히 그 사랑과 함께 항상 간직할게요.
삶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삶을 접을 때가 되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는 아이러니하다. 삶의 기억과 추억들. 사랑의 시간과 세월을 간직한 채 떠난다는 버지니아 울프는 마지막 고백을 통해 사랑과 삶의 의미보다 결국 실존의 고통과 권태, 무의미한 일상의 무기력함이 삶의 영위나 중단을 결정하는 더 큰 동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듯하다.
역사 속 인물인 버지니아 울프가 실제로 그런 이유로 자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오빠들로부터의 성폭행과 학대, 그로 인한 정신병과 우울증 그리고 자살은 영화 속 버지니아 울프와 유사하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았지만, 로라 브라운 역시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가족을 떠나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은 현재 실존의 일상을 제거하거나 그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자신을 지켜내는 행위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을 통해 역설적으로 실존의 고통을 끊어버렸듯이, 로라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버렸다.
영화 속 버지니아 울프, 로라, 리차드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나름 평화로운 환경을 두고 죽음을 선택하거나 그것들을 버린 채 떠난다. 그것이 단순히 우울증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부족하다. 행복의 조건이 행복을 보장해주며, 삶의 동력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그런 환경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상처와 실존의 고통을 더욱 부각시키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받은 상처를 지닌 채 세상과 사람을 불신하고 불안한 상태로 살아온 버지니아와, 영화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깊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삼키며 버텨왔던 로라.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를 평생 지닌 채 살아온 리차드. 그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해주던 레너드와 남편, 자식 그리고 클래리사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먼저 세상을 등졌을지도 모른다.
그냥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다 중요한 질문은 어떤 힘으로 살아야 하는지다.
그리고 존재와 실존의 문제의 답을 찾는 과정, '나' 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다. 이런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행복의 조건인 사랑과 가족, 가정의 가치를 좇을 수 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행복의 조건을 쌓는 일은 마치 입꼬리는 미소를 짓지만,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로라의 모습처럼 슬픈 행복, 슬픈 화목을 추구하는 일이 될지 모른다.
레너드의 사랑과 헌신마저도 버지니아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처럼, 함께한 오랜 세월과 소중한 시간들도 결국 간직할 수밖에 없는 추억으로 잊혀지는 것처럼, 사랑과 시간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에겐 위대한 사랑과 세월마저도 이기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진정 죽음과 떠남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