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gs to come, 2016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그래 청춘은 아플 수 있다. 처음이니까, 어리니까, 웬만하면 다 새롭고, 조금만 틀어져도 어쩔 줄 몰라하며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살만큼 살고, 이룰 만큼 이뤘고, 안정의 평화 속에 완전 적응해 사는 중년에게 삶의 근간을 흔드는 변화라면 어떨까. 웬만하면 이미 젊었을 때 다 해봤고, 다 겪어 봤고, 느껴봤고, 누려본 중년에게 작지 않은 환경, 심정의 변화가 닥칠 때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을 무엇일까.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은 무엇이며, 이미 식어 버린 심장과 세상의 자극에 무뎌진 신경 그리고 '새로움'과 '처음'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의 권태가 이미 몸에 배어버린 그때에 '변화'와 그로 인한 '새로운 느낌'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닥친 여러 시련과 그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과 태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영화이다. 교재를 집필하는 잘 나가는 고등학교 철학교사이자, 다 키운 두 자녀의 엄마, 대학교수의 아내 그리고 불안증을 앓고 있는 엄마의 딸로서 사는 나탈리는(이자벨 위페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는 가족과 의 여행 중에도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글을 쓸 정도로 철학적 사고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졸업하고도 꾸준히 찾아오는 제자(파비엥, 로만 코린 카 분)가 있을 정도로 교사로서도 존경받는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어느 날 많은 변화가 일어 난다. 이십여 년 함께 살을 맞대고 산 남편(하인츠, 앙드레 마르콩 분)이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갈라서잖다. 치매로 요양원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던 엄마(이베트, 에디뜨 스꼽 분)도 세상을 떠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출판사에서는 교재 제작 개편을 하면서 그녀를 배제한다. 남은 것은 사랑스런 제자.허나 진보적인 정치적 색깔을 갖고 있는 제자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며칠 같이 묵으며 그나마 위안을 얻고 있는데, 그곳에서 믿었던 제자에게 마저 상처를 받는다. 한 때 소련에 갈 정도로 공산주의와 진보의 가치에 열성적이었지만, 지금은 안정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 기득권,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그녀에게 제자는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취급을 한다.
결코 작지 않은 삶의 변화 속에서 그녀는 슬프고 힘들지만, 덤덤히 그리고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전에 겪어보지 못한 '자유'라며 오히려 변화를 즐기려 한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책 한 권을 들고 바람 부는 산 위에서 위안을 찾고, 심야영화를 보며 고독을 즐긴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은 충분히 성숙하고, 자연인으로서 온전하다. 중년의 나이에 흔들림 없는, 눈물마저도 절제되고, 정제되어 있는 그녀의 태도와 성숙함은 어떤 면에서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다.
50대 중년의 여성에게 남편은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했던, 사랑해서 이룬 결과물-가족-에 대한 근거이다. 결혼 이후의 삶 속의 또 다른 나이자, 분신이다. 그런 남편의 외도의 고백이 충격적인 것은 사랑의 기억과 그 오랜 시간의 추억이 의미 없는 시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탈리는 남편의 고백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물병을 집어던지거나, 책을 찢어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단지, 남편이 없는 집 테이블에 놓인 꽃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릴 뿐이다. 마치,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막장 드라마 여주인공이 의연한 척, 쿨한 척 받아들이고 뒤에서 복수의 칼을 가는 모습과는 다른 진짜 의연함이다.
엄마의 죽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슬프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자연인으로서, 여자로서 엄마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으며, 엄마의 삶 나름대로를 존중한다. 단지, 부모의 죽음이 중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삶의 근간을 흔들어 버릴 정도로 큰 일은 아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때가 왔을 뿐이다.
출판사로부터 새로운 교재 제작 과정에서 배제되는 일도 큰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변해가는 시대와 시장이 요구하는 새로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녀가 배우고 겪어온 시대와는 분명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출판사 직원들에게 화를 내거나, 왜 내가 배제되었는지 따져 묻지 않는다. 그냥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제자의 솔직한 고백에도 조금은 상처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 틀린 말도 아니다. 공산주의에 열망하던 20대의 그녀는 분명 없다. 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한심하게 보고, 수업을 들으라고 잔소리하는 꼰대의 50대 여선생님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좌파의 철학을 쫓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제자를 기특해 여기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면 변할 수 있다. 제자에게 그녀의 사상적 변화는 변절과 배신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가 2030대이기 때문일 수 있다. 새로움과 변화 그 자체가 따분하고, 권태와 불편감을 주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것은 그저 젊은이의 치기 로보일 수 있다.
나탈리가 그렇게 작지 않은 변화 속에서도 작은 요동은 있지만, 큰 흔들림 없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그녀가 환경과 감정의 변화에 쓰러지지 않고,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영화라면 어느 억척스런 아줌마의 인생 역경 스토리로 만들어질 만한 소재임에도 막장 장면 없이 무미건조하게 견뎌낸 나탈리에게는 무엇이 있었을까.
날씨 좋은 날, 산 중턱에 올라가 누워 읽던 철학 책일까. 아이들을 가르칠 때, 자연스레 읊는 어느 철학자의 명언(?) 한 구절일까. 가족일까. 그동안 쌓여온 삶에 대한 단단한 시각과 철학일까.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다가오는 것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어떤 방법과 처세,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 살아온 그 사람의 삶 그 자체일지 모른다. 나탈리의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그녀가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세상을 대하고 생각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어떻게 켜켜이 쌓여 왔는지는 '안정'과 '행복', '균형'일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환경과 소유가 주는 만족과 행복의 착각이 걷어졌을 때, 비로소 내가 가진 것이 아닌 내가 이룬 것이 아닌, 내가 쌓아온 진짜의 삶, 진정한 '내 모습'이 드러난다. 내게 나탈리와 같은 삶의 불안정과 혼란이 다가왔을 때 나는 의연한 척이 아닌 진짜 의연하게 감당해낼 수 있을까. 단순히 순간의 태도의 문제가 아닌 삶 그 자체의 문제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