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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Oct 29. 2017

행복의 역설, <행복의 기원>

서은국, 2014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답은 '행복'이다. 행복은 최상의 선을 의미하고, 이런저런 긍정의 가치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을 위해 산다는 말에 '수준 낮다', '의미 없다' 말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맞다며 맞장구쳐주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 줄 것이다. 하지만 '당신', '나'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바꾸어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답은 조금 다를 수 있다. '나'는 행복을 위해 살지만,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보다 더 나은 행복이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살지만, '인간'의 존재 당위성이 '행복'에 있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행복'이란 놈은 실체가 없다. 그저 '인간'은 살아 있기에 살아간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식상하지만 실존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이 질문에 대해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나아가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행복은 인간의 삶의 목적이 되는 고귀한 가치와 개념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자 감각이고 쾌락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행복'이라는 무고하고, 착한 친구를 조목조목 까는 차가운 분석에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사실 별거 없는데 포장만 거창하고, 질소로 가득 찬 과자 봉지를 뜯어 실체를 드러내는 통쾌함과 시원함이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미래의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 거창한 위시 리스트와 꿈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일련의 과정과 의무에서 해방된 느낌도 들었다. 심지어 그동안 근거 없이 막연하게 인용하기만 했던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는 가난뱅이의 자위적인 문장을 심리학으로 분석하고 증명해준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이미 가진 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행복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는 책의 말은 행복의 조건의 늪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희망을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을 잡으려 할수록 행복에서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은 행복의 기원과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기인한다. 실체 없는 행복을 삶의 목적과 최상의 가치, 관념으로 맹신할 때, 우리는 끝없는 좌절과 몽상으로 오히려 지친다. 행복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MSG를 털어내고, 전보다 맛은 덜하더라도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다면, 일상의 기쁨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을 맛보고,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수많은 심리학 논문과 서적을 인용하며 학문의 끝판왕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까는 당돌함과 과감함을 보이지만, 책의 말미에 결국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허탈하고, 반전 없는 결론을 낸다. '결국 이건가'라는 허무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럼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있을 거라 기대했던 건가'라는 생각과 오히려 그것이 행복의 실체이고 진의라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행복이 뜬구름 같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서 다행이고,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잡아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다.

<행복의 기원>은 인간을 동물로 규정하고, '행복'을 쾌락이자 수단으로 폄하?하기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책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행복 조건의 역설과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유'를 선사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위로보다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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