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2009
나의 마음과 생각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감동, 공감의 정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을까. 내 감정과, 생각과 의도를 끄집어 내어 보여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반대도 그렇다.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것은 개개인으로서 주체자인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갖는 실존적 한계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 단절되어 있는 인간의 소통과 교감의 한계를 냉정하지만 사실적으로 규정한다. 쉽게 말해,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며, '니가 아무리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이해한다 해도 결코 나를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라는 의미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대화와 소통 나아가 사랑이, 교감의 과정에서 결국 '인정'과 '공감'의 찌꺼기를 찾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속상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사랑하는 연인과도 그렇고,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지붕에서 살아가는 가족 간에도 그렇다. '하나 된 우리',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애써 따듯한 울타리로 묶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거리감과 어색함이 있다. 그 단절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부모와 자식, 형제와 연인 간에 '나는 너를 잘 알아' 와 같은 관계의 오만함이 문제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 속 소설들은 모두가 타인으로서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고향인 인도를 떠나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들 모습과 그런 설정은 친구가 없는 타국 속 이방인이기에 오히려 가족 관계에 집중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갈 때, 모든 관계의 에너지와 관심은 가족에게 집중되며, 그것은 곧 과도한 관심과 이해의 오만함을 낳는다.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를 모시려는 딸과 정작 그것을 원치 않는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를 잊고, 새 사랑을 시작한 아버지가 야속한 딸과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아버지. 기대했던 동생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린 모습을 바라보는 누나와 가족의 사랑과 기대가 도리어 부담이 되어 엇나간 동생.
가족이라는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관계 단위에서 마저도 분열이 있고, 하나 되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 만큼 양가감정이 드는 단어도 없다. '따듯함', '아늑함'과 동시에 '권태'와 '지겨움' 같은 애증이 느껴진다. 가족이라서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꼭 그만큼 단절이 있고, 답답함이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식은 이렇지', '내가 알고 있는 우리 부모님은 이렇지'라며 잘 아는 듯 말하지만, 가족이라 하더라도, 내가 업어 키운 자식이라 하더라도 결국 '나'와 '너'라는 관점에서 먼 나라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같은 '타인'에 불과하다. '가족'과 '타인'의 거리가 '가족'과 '나'의 거리 보다 더 가깝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인간이 평생 지녀야 할 할 슬픈 진실이다. 한탄하고 원망해도 그 거리를 좁힐 수는 없다. 소통과 교감, 공감의 스킬을 키운다 해도 상대의 진의를 오롯이 알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족'과 '나'의 거리가 '타인'과 '나'의 거리와 같음을 인정하며 독립자로서 형제, 부모와 자식 그리고 연인을 대할 때 비로소 동등한 인간으로서 그나마 수평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
<그저 좋은 사람> 을 읽고 나니 가슴 한켠에 싸한 가을바람이 분다.. 사랑한다 말하지만, '사랑'의 부분적인 의미조차 담아내지 못하는 공허한 외침이 전부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글프다. 허나,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상대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는 없어도,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는 의미 있을지 모른다. 잡을 수 없는 연기를 잡으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의미해 보여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행위 자체가 전부일지 모르니 말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줌파 라히리도 말했다.
꽃은 활짝 핀 순간이 아니라, 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가장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