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2012
내가 일하는 회사의 작년 사내 슬로건은 '한계돌파'였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금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자'라는 의지를 발현시키는 훌륭한(?) 슬로건이었다. 생각해보면 한계라는 것이 "힘이나 책임, 능력 따위가 다다를 수 있는 범위"를 의미하는데 그것을 뛰어넘으라는 '한계돌파'라는 말은 매우 모순적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의 역설법처럼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라 효과적인 메세지로 썼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와 동료들은 자신의 한계도 모른 채 '한계돌파'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던 슬픈 작년을 보냈었더랬다. 하지만 내가 슬로건을 만드는 사내 문화 담당 팀원이었다면, 회사의 경영진이었다면, '한계돌파'라는 슬로건은 참 잘 지었다라고 기특해 했을 것 같다. 그것은 이미 고용된 피고용인들의 노동력을 '무한요금제' 라는 말처럼 최대한 빼먹기 위한 효과적인 동기유발 메세지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열심히 일해', '최선을 다하면 월급이 올라간다'라는 수동적인 말보다, '나는 나를 넘어선다'와 'yes, I can' 같은 인스타 해시태그 문구만큼이나 능동적 자기도취 메세지가 더 먹힌다. '한계돌파'는 '당신의 가능성은 지금 보다 훨씬 더 많아요. 이 정도 성과로 최선을 다했다라고 생각지 말아요. 야근을 하든, 집에 가서도 일을 하든 아무튼 알아서 더 쥐어짜서 지금 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봐요. 화이또 : ) ' 와 같이 직원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나도 정말 순간이지만, 사내에 걸려 있는 로케트가 대기권을 돌파하는 듯한 그림과 함께 쓰여진 '한계돌파' 포스터를 보며, '내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 한계를 돌파해보자! 아자! 사장님 땡스맨.' 과 같은 정체불명의 동기와 의지가 불현듯 샘솟아 당황했었다. 그런 면에서,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말했듯, 자기 스스로 착취하게 하는 것이, 타자에 의한 강요의 그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29)
저자는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직원들을 마른 수건 짜듯, '무한요금제' 만땅으로 꽉 채워 쓰듯, 일시키던 사장님도 스스로 착취하는 피해자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월급쟁이 사장님에게는 맞는 말....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S그룹 VIP인 JY에도 해당되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과거의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패러다임이 이동해왔다는 저자의 말에는 100프로 공감한다.
저자에 따르면, '성과사회'는 "~해서는 안된다", "~해야만 한다"는 규범적 명제가 지배하는 규율사회와 대비하여 한계가 없는 무한정의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사회다. 근대까지만 해도, 도덕과 규칙, 규범을 지키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최선의 삶이었지만, 현대의 '성과사회'는 규범의 자리에 효율과 성과가 위치한다. 명령, 금지, 규칙의 자리를 가능성, 할 수 있음, 동기부여가 차지한다. 성과사회에서는 능동적 행동과 사고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울타리 없는 자유와 가능성'의 사회와 시스템에 스스로 착취당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표적이면서 고질적인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와 같은 질병들은 이런 '성과사회'의 무한 가능성 토대에 생겨났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p.103)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p.28)
효율/성과 → 성과사회 → 자기착취 → 우울증 → 자살로 이어지는 '성과사회'의 극단적인 도식은 인터넷 뉴스 기사나 주위를 둘러만 보아도 결코 '극단적'이지 않다. '네, 할 수 있습니다', '네, 잘 모르겠지만, 노력해서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와 같은 말들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이기에 '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겠고, 못하겠습니다'의 대답을 하는 개인들에게는 그 갭만큼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성과사회'의 자기 착취와 파괴적인 개인들에게 저자는 '깊은 심심함'이라는 처방을 제시한다.
깊은 심심함이란 사색이며, 사색적 삶이란 자극에 대한 반응을 늦추고, 스스로 천천히 생각하는 정신적 이완의 삶이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과잉된 긍정의 기계적인 반응을 멈추고, 외부의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을 멈추고, '할 수 없다', '아니다'라는 부정의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p.32)
'사색'을 통한 '성과사회'와 그로 인한 '피로사회'로부터의 도피.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한계돌파'와 '무한한 가능성'을 외치는 수많은 자기계발, 경영 서적들 사이에 한줄기 빛 같은 희망의 메세지와도 같다. 피로마저도 '간 때문이야'라고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몸'에게 책임을 전가? 하는 이 시대에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었다'는 반전의 팩트를 제시하는 <피로사회>의 메세지는 섹시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러면 그렇지. 시대가 비정상이었던 게지' 와 같은 위로와 희망을 주면서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존적이며,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패러다임과 'ㅇㅇ시대'와 같이 그 시대를 규정하고 둘러싼 이념과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 또는 인간에게는 단순히 관념과 이념이 아닌 극복하기 어려운 전부이다. 객관적으로 시대의 개념을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이 멋진 일이기는 하지만 당장 내일 다시 '한계돌파' 하기 위해 출근하는 개인들에게는 현실성 없는 추상적인 공허한 관념일 뿐이다. 조직에서 '아니오', '할 수 없다'는 반응은 조직을 떠나겠다, 내 밥줄 내가 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성과사회', '피로사회'에 대한 시대 진단은 명쾌했으나, 그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사색하는 삶'이 '미움받을 용기'와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심리/힐링/위로 메세지와 크게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아쉽다. 어쩌면 답이 없는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 답이 '사색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피로사회>에 대한 수많은 극찬과 비판은 누구도 명쾌하게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로사회>의 '사색하는 삶'의 태도는 인문, 교양의 사색적 결과를 넘어 깊은 철학적 사고와 탐구 끝에 제시한 하나의 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장 월요일에 다시 '한계돌파' 하러 가야 하는 '무한요금제' 의 실존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퇴근 후에는 '사색하는 삶'을 통해 이놈의 '피로사회'와 '성과사회' 안에서 작은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것이 현실적인 절충안이라면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