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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Mar 12. 2017

결혼의 문제, '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 2006

작가는 책의 말미 작가의 말을 통해 이것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3년의 새로운 판에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란다. 게다가 목차의 제목은 '연애', '결혼', '부부', '가족' 이다. 작가의 말과 목차의 단어로만 보면 이 책은 지극히도 평범한 이야기다. 두 남녀가 사랑해서 연애하고, 이후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인 듯 보인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아니, 책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아내가 결혼했다' 라니. 아내의 결혼의 상대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이다. 어쩌면 7글자의 책 제목으로 이 책 한 권을 요약할 수 있으니, 제목은 기가 막히게 지었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야말로 내 아내가 다른 놈과 결혼하여 사는 이야기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중혼의 이야기를 보며, 이런 사랑도 있고, 이런 결혼의 형태도 현실적으로?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부일처가 무조건 정답은 아니지. 사회적으로, 인류사적으로 일부일처가 보편화된 시대일 뿐이지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어. 다양한 결혼과 사랑의 모양이 있는거야' 라는 생각 동시에, 대학시절 흥미롭게 공부하던 다양성과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개념들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다양성이 진리인 오늘날, 일부일처제라는 단일화된 결혼의 형식은 전근대적이고, 획일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절대 권력인 대통령도 탄핵시킬 수 있는데, 결혼은 한 사람과만 해야 한다는 현실이 어째 부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책과 영화를 본 후, 오히려 역설적으로 일부일처제의 정당성에 한 표 던지게 되는 것은 왜 일까.

다양성은 우리가 부단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만, 다양성 그 자체가 옳은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때로 다양성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다양성 그 자체에 매몰되기도 한다. '결혼도 한 가지는 안돼. 결혼도 다양하게 할 수 있어. 그게 다원주의의 시대에 맞아' 를 넘어 '결혼과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결혼과 사랑은 나와 당사자만의 문제일까.' 에 대한 물음을 조금 더 진지하게 할 때,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등의 결혼의 모양에 대해 비로소 제대로 결정할 수 있다.


어찌 되었건, 발칙한 결혼과 사랑에 대한 이 책을 읽고 몇 가지 질문이 남았다.


첫째, 사랑은 한 사람과만 해야 하는가?
둘째, 사랑과 결혼의 상관관계는?


사랑이란, 감정의 행위이자, 당사자 간의 문제다. 그렇다면, 사랑의 감정의 울타리 안에서, 당사자간의 동의만 있다면, 양다리, 바람, 사다리 등. 사랑의 감정을 공식적으로 타인과 공유하고, 나눌 수 있을까. '사랑은 한 사람과만'이라는 불문율은 그저 보편적인 윤리일 뿐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고, 감정이라는 것은 무자르 듯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애매모호한 사랑의 감정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흩어져 뿌려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은 한 사람과의 사랑의 행위만을 인정하려 하고, 그것이 보편의 도덕인 세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회가 정한 무언의 규칙일 뿐이다. 당사자간의 동의라는 전제하에, 양다리든, 세 다리든, 오다리든. 그것은 어쩌면 그들만의 이슈이며, 규칙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법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간통죄도 폐지된 마당에,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사랑의 관념을 법으로, 사회적 잣대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당사자간의 문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런 자유로운 연애는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성숙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자연인의 행위일 뿐이다. 성숙한 관계는 책임을 전제로 한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울타리 없는 초원 위의 말과 같다. 그 말은 언제 어디나 달려가 풀을 뜯어먹을 수 있다. 여기 풀이 맛있으면, 여기서 먹고. 저기 풀이 싱싱해 보이면, 저리로 달려가 뜯어먹으면 그만이다.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 없다. 문제는, 초원의 풀이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리고, 초원에는 말이 수십, 수백 마리가 함께 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내 울타리. 너와 나의 울타리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그 울타리 안에서는 자유롭게 풀을 먹을 수 있다. 그것은 암묵적인 규칙이며, 결국 모두가 행복하고, 쾌적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울타리를 넘지 않음으로, 너와 나의 자유를, 영역을 지키는 성숙한 책임의식이며, 절제이다.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감정'이 들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컨트롤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랑의 '행위'는 의지의 문제다. 사랑은 감정을 넘어, 선택의 행위이자, 의지의 산물이다. 일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느리고 지겨워서, 급행으로 갈아탈 수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일반과 급행 지하철을 탈 수는 없다. 그것은 수백 마리의 말이 모여 풀 뜯어먹는 초원의 불문율이다.


아내 손예진이 중혼을 제안한다면? 어떨까. 거절할 수 있을까. 슬프지만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사랑과 결혼의 상관관계는?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생각해 본다면, 사랑과 결혼은 밴다이어그램의 관계가 아닐까. A집합과 B집합. 그리고 겹치는 교집합의 공간. 사랑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는 A차집합, 결혼은 했지만 사랑이 없는 B차집합. 그리고, 사랑과 결혼이 공존하는 교집합. 모두가 바라는 결혼과 사랑은 교집합의 지점이다. 다만, 교집합의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의 감정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애끓는 사랑의 감정이나, 설레는 핑크빛 두근거림 보다는, 나보다 상대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 희생과 섬김의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바로 결혼생활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진화된 사랑일 테다. 그렇게, 연애의 사랑은 결혼 혹은 일상의 사랑의 지점에서 내 기쁨과 내 쾌락, 내 설레임을 넘어 상대방과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내려놓음의 사랑으로 발전된다. 무엇이 더 낫다고 섣불리 답할 수는 없지만, 일상의 사랑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의 사랑보다 진중한 사랑의 의지와 노력이 있을 때 더 오래갈 수 있다.  


'아내가 결혼했다'와 유사한 결혼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관한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의 준영(감우성)과 연희(엄정화)는 사랑의 선택에 있어서 결국 준영은 A차집합을, 연희는 A차집합과 B차집합 모두를 선택했다. 연희의 선택은 조건과 사랑. 현실과 사랑 둘 중에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개인의 선택은 자유이나, 둘 다를 책임짐 없이, 둘 다를 선택하는 것은 둘 다를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파괴적이며, 무의미하다. 준영과 연희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사랑과 결혼의 애매한 지점을 끝까지 헤맬 것이고, 감정이라는 한 가지 속성만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조건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상대와 결혼했기에, 사랑과 결혼 모두를 놓치게 될 것이다. 결혼이 미친 짓이 아니라, 책임 없는 사랑과 희생 없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두 집 살림은 사랑과 결혼 둘 다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둘 다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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