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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Oct 13. 2018

가을예찬

가을하늘, 가을이라는 위로

'carpe diem', 'seize the day'. 순간을 즐기고, 오늘에 충실하라는 말의 진의는 알겠으나 사실 그리 좋아하는 말은 아니다. 현재만 바라보고 사는 삶은 어째 좀 서글프기에. 허나 2018년의 가을을 보내는 지금, 소리 없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carpe diem'. 순간을 잡고 싶은 대상은 가을 자체다. 가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끼고 만질 때, 순간은 찰나이면서 영원이 된다. 올해의 가을은 유독 아름답다. 그것은 여름과 겨울 사이 짧은 순간이기에 더욱 그렇고, 그만큼 간절했기에 더욱 그렇다. 평범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선물 같은 가을을 누리고 예찬할 때 세상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지금 내게 묻는다면, 두 가지로 손쉽게 답할 수 있다. '가을하늘'과 '가을이라는 위로'.  



가을하늘  
기록적인 폭염과 미세먼지의 환상의 콜라보. 2018년 여름을 겪으며 우리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보다 어려운 난제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위냐 미세먼지냐'. 숨이 턱 막히는 날씨에 미세먼지는 좋음이고, 기온이 내려가 살만해지면 미세먼지는 나쁨이 되는 진퇴양난의 여름 날. '덜 덥고 미세먼지 나쁨인 게 나은가, 겁나 덥지만 공기 좋은 게 나은가'. 개인적으로 무조건 후자다. 미세 먼지가 하늘을 감싸고, 이에 뒤질세라 황사가 건재함을 과시하는 봄여름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라는 노래 가사가 무색하게 더 우울해지고 난 역시 혼자임을 깨닫는다.
불행 중 다행히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요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this is 가을 하늘'이라고 말해주듯 그 매력을 뿜어낸다. 구름 한 점 없는 색 도화지 같은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숨 크게 들이 마실 때면, 봄여름 그토록 마셔대던 황사와 미세먼지가 깨끗이 씻어지는 느낌이다. 조금 MSG 보태면 폐 속 깊숙이 박혀 있는 미세먼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적인 느낌. 특히 저녁 하늘.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노오란 태양빛부터 높은 하늘의 진한 퍼어런색까지. 아이의 생그러움부터 어른의 진중함까지 모든 걸 담고 있는 듯한 저녁의 가을하늘은 그야말로 숭고하다. 그 숭고함은 어떤 포토샵 효과로도 만들기 어려운 가을하늘의 그라데이션이다. 라라랜드 LA 할리우드 언덕배기 노을 못지않은 맑고 환상적인 서울의 가을하늘은 그야말로 탭댄스를 추게 만든다.
나쁜 남자가 아홉 번 잘 못해주다 한 번 잘해줄 때 더 매력적이듯, 가을하늘은 봄여름겨울 나쁘다 짧은 기간 잘해 주는 느낌. 알면서도 나쁜 남자의 매력에 빠지듯 가을하늘의 치명적인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누가 가을이 천고마비의 계절이고,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어느 누가 가을의 상징을 코스모스와 단풍이라고 했던가. 그 모든 걸 품는 건 결국 하늘이다. 2018년 가을은 하늘의 계절이다.   



가을이라는 위로
봄이 싱그러운 시작이고, 여름이 뜨거움의 과정이며, 겨울이 침잠하는 마무리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쉼 없이 달려온 한 해를 잠시 돌아보게 하는 쉼의 계절이다. 바뀐 해에 이제 좀 적응할라치면 벌써 9월이 되는 매해 가을이 되어서야 잠시 숨을 고른다. 벌써 9월이라니. 이제 찬 바람 불고 낙엽이 지면 겨울이 오고 한 해가 가다니. 예비군 훈련 시간은 느리나 한 해의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그런 한 해를 처음으로 되돌아보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가을의 되돌아봄은 여유가 있기에 더 좋다. 12월의 돌아봄이 후회와 아쉬움이라면 가을의 돌아봄은 기분 좋은 반성이다. 1월에 계획했던 일들 아직 다 하지 못했을지라도, 작심삼일 결심한 다짐을 아직 시도조차 못했을지라도, 아직 몇 개월이 더 남았기에 위로가 된다. 그래서일까, 가을은 내게 관대한 계절이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앞서 달려온 봄의 에너지를 도닥이며 잘 살아온 나를 위로하고, 남은 한 해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절. 여름의 혈기와 열기를 식히며 모르게 상처 준 타인을 돌아보게 하는 계절.
그런 점에서 가을은 진중한 어른의 계절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여유와 앞으로를 다짐하는 계획의 균형을 맞추는 어른. 잘 못했다고 다그치거나 잘 좀 해보라며 부담 주는 선생이 아닌, 지금껏 고생했다 어깨를 토닥이고 푸근하게 안아주는 어른. 한 학기 마치고 새로 만회할 새 학기를 주는 관대한 어른. 높은 하늘과 청량한 공기로 위로를 주는 어른. 그렇기에 때론 내 시작과 내 성장이 중요한 봄보다 어른의 푸근함이 있는 가을이 더 따스하다. 짙푸른 신록도, 바캉스 가는 휴가도, 낭만적인 성탄절도 없는 무미건조한 가을이지만 그래도 가을이 좋다. 가을이 주는 위로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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