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에 대하여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고민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의 상황에 맞는 말을 하기 위해 애를 썼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00아, 결국 다 지나간대 ‘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하기도 하고, 때론 긍정적인 말의 힘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힘껏 맞장구를 쳐주며 감정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런 말 한마디가, 맞장구 한마디가 힘든 때를 쉽게 지나게 해주는 시절이 있었다.
예전에 한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힘들 때 긍정적인 말을 해주는 친구가 싫어. 그냥 할 수 있는 말이잖아. 나도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는 그런 말.‘ 그 친구는 아마 말에 기운이 담기지 않고, 그냥 쉽게 쉽게.. 인스턴트식 위로에 싫증을 느꼈었던 것 같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요즘은 인스턴트식 위로를 뱉는 것도 부쩍 힘에 부치는 일이다. 누군가가 지쳐있는 상황을 듣는 것 만으로 피곤하다. 기가 빨리고, 몸이 축축 늘어진다. 비단 육체적으로 지쳤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왜 그럴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각자의 타이밍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의 나와 친구들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패턴으로 삶을 공유한다. 비슷한 시간대와 비슷한 장소 내에서 활동하며 자라게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어떨까? 각자의 시간대와 서로 다른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살아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필히 성장하게 되고, 이 성장을 바탕으로 성숙의 진하기가 결정된다. 어떤 친구는 나보다 -10의 성숙함을, 또 다른 친구는 +10의 성숙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10을 견디며 위안을, +10을 견디며 위로를 얻기도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습으로 닮아가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드문 행운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정말 단순한 이유로 엇갈리기도 한다. 내가 행복할 때에는 네가 불행하고 내가 불행할 때에는 네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가 가진 불행이 감당이 안될 때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 속의 여러 번의 성장을 통해 알고 있다. 내 기분이 소중하듯이, 타인의 기분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래서 배려라는 명목으로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기도 한다. 이처럼, 타이밍이라는 게 지긋지긋하게 우리의 삶에서 작동하며 어른이 된 우리가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이 더더욱 어려워지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요즘의 나는 여러 친구에게서 필요한 부분을 각자 다르게 얻는 걸로 인간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A에게는 취업에 관련된 고민을, B에게는 인간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C에게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고작 20대 인터라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통과하는 이 시간이 쉽게 위로하기도, 쉽게 위로를 받기도 어려운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럼, 말을 아끼며 과연 이 다음은 뭘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