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 미주• 유럽의 게스트 초청 업무에 비해,
내가 담당했던 한국 게스트 초청 업무가 무조건!!
더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작품으로, 공식 초청되는 게스트 외에-
“개•폐막식”에 초청해야만 하는,
게스트가 더해지기 때문이었는데..
한국 영화계 측 관계자들과
부산시 측 관계자들까지..
거의 천 명이 넘는 게스트를,
혼자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ㅠㅠ
(물론, 부산시 측 초청 인사들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이 상근했던 주사님이
주도적으로 진행을 하시긴 했지만..
큰 틀에서는, 내가 함께 관리•조율해야 했다.)
게다가, 초청된 게스트에 대해 항공• 숙박•
의전• 배차 등의 파생되는 업무에 있어서도..
그때는, 영화제의 모든 공식 행사나 상영 등이
거의 남포동에서 진행되던 시절이었는데..
외국 게스트들은 대부분 실리적으로,
남포동 쪽 숙소를 이용했던 것에 반해..
한국 게스트들의 숙소는 대부분,
해운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김해공항 - 해운대 - 남포동을 오가는
게스트들의 원활한 이동까지!!
모든 일들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내가
죽어날 수밖에 없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또, 그 때는 국제 영화제 자체가
완전 초창기였던 시절이었으니..
게스트에 대한 각종 제도나 원칙이
자리 잡고 공유되기 전이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데;;;
개•폐막 초청과 작품 초청을 구분하지 못하는,
다수의 게스트들과 까다로운 원로 어르신들이..
왜 누구는 1박 2일 초청이고,
누구는 3박 4일 초청이냐?
왜 누구는 숙소가 파라다이스 호텔인데,
누구는 하얏트 호텔 / 그랜드 호텔이냐?
이런 식으로, 숙소나 여타의 상황에 대한
각종 불평• 불만• 항의의 민원까지..
모든 것을 고스란히-
혼자 다 받아내야만 했던 나에게..
모두가 인사처럼 건넨, “명복을 빈다” 라는 말이..
정녕 빈 말은, 절대로 아니었던 게다. 엉엉-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나고-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죽을 만큼) 힘들었던 만큼,
얻은 것도 많았던 것 같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 때 맺어진 많은 인연들이,
내 영화 인생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으니까^^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이어져 오는
다양한 인연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나씩 이야기 해볼 테니, 기대해주시랍! ^^